폭염특보 때 '10~15분 휴식' 정부 지침
강제성 없어 현장에서는 사실상 사문화
"작업 온도별 지침 마련해 노동권 보호"
“시간마다 휴식은 무슨… 그저 하루 할 일을 빨리 끝내는 수밖에 없어.”
한낮 최고기온이 34도까지 오른 19일 서울 동대문구 한 건설현장. 건설노동자 김모(75)씨는 비 오듯 흐르는 얼굴의 땀을 수시로 훔쳐냈다. 전날부터 서울에 ‘폭염주의보’가 발효된 고온이지만, 그는 안전모에 두꺼운 작업화, 몸을 뒤덮는 긴 옷으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일사병이나 열사병 위기에 놓인 노동자를 보호하겠다며 정부가 마련한 가이드라인이 있지만, 현장에선 별로 쓸모가 없어 보였다. 김씨는 19일 “위에선 공기(공사 기한)를 맞추라고 닦달하는데 어떻게 한 시간마다 쉴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일찍 찾아온 폭염이 시민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안전도 위협하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온열질환 예방가이드를 보면, 폭염특보가 발령되면 10~15분 이상 규칙적으로 쉬고, 무더운 시간대(오후 2~5시)에는 옥외작업을 최소화하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지침에 불과하다. 강제성이 없는 탓에 노동현장에선 ‘유명무실’한 경우가 허다하다. 강서구 한 근린생활시설 건설현장 관리자는 “공기에 맞춘 할당량이 있어 휴식을 자주 부여하기가 어렵다”고 털어놨다. 오후 2~5시 옥외작업 최소화 지침 역시 “그렇게 하다간 일당을 아예 못 챙기는 노동자가 수두룩할 것”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인근 공사장에서 일하는 50대 노동자도 “시간 맞춰 쉬겠다고 하면 ‘오야지(작업팀장)’가 당장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할 것 같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방자치단체가 발주한 공사현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대문구 이문동 한 도로에선 보도블록 및 경계석 정비공사가 별도 휴식 시간 없이 쭉 진행됐다. 구청 관계자에게 정부 지침을 설명하자, “공사 시간이 짧아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앞으로 개선하겠다”는 해명이 돌아왔다.
물류센터 역시 무더위에 취약한 작업장 중 하나다. 고용부 가이드는 규칙적 휴식에 더해, 실내 작업장에 △온ㆍ습도계 비치 △공기순환장치나 선풍기, 냉풍기 등 국소냉방장치 설치 △야간작업 시 실내온도 관리 등의 추가 지침도 정해놨다. 하지만 작업장 안에 냉방장치가 설치돼 있어도 체감온도가 33도를 넘기지 않으면 사측 재량으로 휴식을 주지 않는 회사가 더러 있다. 물류센터는 대개 규모가 커 같은 작업장에서도 노동자마다 느끼는 체감온도가 제각각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것이다. 체감온도에 따라 휴식시간을 부여한다는 사측 주장은 검증이 쉽지 않아 노조 측과 자주 마찰을 빚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지난 5년간 온열질환 진단을 받은 노동자는 152명. 이 중 23명이 숨졌다. 더위가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 치명적이라는 사실이 고용부 수치로 입증된 셈이다. 류현철 일환경건강센터장은 “모든 작업장에 저온, 고온 등 상황에 따른 세부지침을 두는 것은 물론, 작업을 중단했을 때 일용직 노동자들의 생활임금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등에 관한 사회적 합의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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