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32> 전남 나주시 반남면 고분군
영산강 마한문화의 상징, 대형옹관무덤
우리나라 고대 무덤들 중 영산강 지역에서 대형 옹관(甕棺·항아리 모양의 토기 관)을 사용해 왕이나 수장의 장례를 치른 것은 한반도 다른 지역에선 볼 수 없는 대단히 특이한 마한(馬韓, BC 2세기 초 고조선 멸망 이후 AD 3, 4세기까지 목지국이 주도한 경기·충청·전라 일대 소국 연맹체) 문화다. 이 지역에는 고대의 옹관 외에도 여러 특징적인 문화 양상이 나타나고 있어 영산강 마한의 정체를 놓고 학자들 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마한-백제의 관계뿐 아니라 지역문화적 요소가 새로운 발전을 하기도 하고, 소위 ’왜계(倭系, 일본풍)‘ 문화요소도 나타나고 있어 그 기원과 복합 과정에 대한 논쟁도 이어지고 있다.
고대, 특히 삼한시대 각 지역의 문화를 보면 한반도가 지역 문화의 다양성이 엄청나다는 점을 알게 된다. 전남 나주시 반남면 일대 옹관 고분군에 나타나는 문화적 특징들은 신라고분에 보이는 북방계문화인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나무 갑을 돌로 덮어서 봉분을 만든 무덤) 전통 외에 한국고대문화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다양한 문화가 복합되는 영산강 유역은 한국고대문화 형성의 도가니(melting pot) 같은 곳으로, 그 화석화된 양상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반남면 고분군과 국립나주박물관이다.
반남면 고분공원
서울 수서역에서 출발한 SRT 열차에 몸을 싣고 구릉성 산지와 널따란 경작지가 교차하는 호남평야를 가로지르다 보면 2시간도 안 돼 나주에 다다른다. 고분공원은 나주시가지 외곽에 위치해 있어 승용차로 이동하는 것이 최선이다. 공원 내부에 국립나주박물관이 있어 마한문화를 보다 쉽게 이해하고 음미할 수 있다. 정비가 잘 된 자미산 자락에 크고 작은 봉분들이 35기 이어진 모습은 방문객으로 하여금 마치 고대의 세계에 들어온 듯 잔잔한 흥분을 느끼게 한다. 덕산리, 신촌리, 대안리 등 행정구역에 따라 고분 명칭이 붙여지고 그대로 사적으로 지정됐지만 모두 연속된 하나의 유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중 신촌리 9호분은 1917년 발굴을 시작으로 2000년대 초까지 여러 기관에서 조사했으니 100년 가까이 조사가 진행된 유적이다.
초지로 말끔하게 정리된 고분공원 속 둥그스름한 봉분들은 모두 비슷한 원형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래는 네모 모양의 방형(方形)이 많았고 내부 구조도 제각각이어서 옹관의 배치라든지 출토되는 유물들이 서로 다르다. 특히 백제계의 석실묘는 고분군의 마지막 단계에 나타나고 있어 드디어 본격적인 백제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경주, 부여 등 다른 역사도시 고분들 역시 외형은 비슷해 보여도 속은 크게 다를 수 있음을 짐작게 한다. 먼저 박물관에 들러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관람한 뒤 공원을 거닐면 고분 내부의 모습을 보다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옹관, 항아리로 만든 관
옹관은 항아리를 주검을 넣는 관으로 사용한 것이다. 항아리 관은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사용됐다. 항아리가 대체로 작기 때문에 시신을 구부려서 넣거나 또는 진도 등지의 초분(草墳)처럼 시신의 살이 썩어 없어지게 한 다음 뼈를 추려 항아리에 넣어 매장하는 이차장(二次葬), 즉 장례를 두 번 지내는 풍습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항아리는 보통 쓰던 항아리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반남면에서 발굴된 옹관들은 크기가 매우 커서 일상생활용으로는 부적절하다. 관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특별하게 제작된 것이다. 이러한 대형옹관문화는 나주, 영암, 함평 외에도 무안, 해남 등 영산강 지역에서 기원후 3세기 말쯤 시작되는데, 반남면 고분들은 4~6세기 초 무덤들로 추정되고 있다.
그 동안 길이가 2m에 이르는 대형옹관의 제작 방식에 의문이 많았지만 '이동 과정에서 깨어질 위험이 크니 무덤 주변에서 만들어 매장에 사용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추측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최근 나주 오량리에서 옹관을 제작한 가마유적과 이후 이동을 위해 사용된 수레바퀴의 흔적이 발굴되면서 오랜 수수께끼가 풀리게 되었다. 당시 이미 대형옹관 제작이 중요한 장례산업이었던 것이다. 성형, 건조, 소성의 과정이 일반 토기와는 다른 대형옹관의 제작과 유통에 특별한 기술을 가진 집단이 있었을 것이고 그 수요자 또한 특별한 신분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촌리 9호분 금동관의 주인은 누구?
반남면 일대 고분 중에서 가장 큰 편에 속하는 신촌리 9호분은 반남면 고분 주인공들의 정체성 논쟁을 촉발한 무덤이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고분들은 수난의 시대였다. 제국주의 합리화를 위한 역사자료 찾기에 혈안이 된 일제에 의해 한반도 곳곳의 고분들이 파헤쳐졌던 것이다. 반남면 고분군도 마찬가지였다.
마한세력의 상징적 유물인 금동관이 출토된 신촌리 9호분은 대단히 특별한 경우다. 1917년 12월 눈발이 날리는 엄동설한에 일본학자 야쓰이(谷井)에 의해 조사가 시작된 지 일주일 만에 대형 옹관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중 을(乙)옹관으로 명명된 것에서 초화형(草花形) 앞머리 장식과 영락이 빛나는 금동관, 금동신발, 장식대도 등의 유물을 발굴하게 되었다. 금동관이 출토된 유일한 사례이자 엄청난 화려함을 자랑하기에 대단한 정치지도자의 무덤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듬해 발굴에서 원통형 토기들이 출토되자 일본 고분시대 대형무덤에서 발견되는 무덤장식 '하니와(埴輪)'와 유사하고 덕산리 3호분이나 대안리 9호분의 봉분 형태나 주구(周溝)의 존재를 들며 '왜인의 무덤'일 것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1938년에는 일본 아리미쓰 교수가 신촌리 6호분과 덕산리 2호분에 대해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앞은 네모형 뒤는 원형인 무덤)과 유사하고 하니와 토기도 있다는 보고를 한 바도 있다. 그렇지만 해방 후 1980~1990년대 조사를 진행한 결과 반남고분군에는 전방후원분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애초에 야쓰이의 보고문은 '임나일본부설'을 염두에 두고 이 지역에 왜계 주민 및 문화의 존재가능성에 대한 논쟁을 촉발한 셈이지만 그동안의 조사결과를 종합해 볼 때 오늘날에는 이들 고분을 포함해 반남고분들은 외래 요소가 가미된 마한토착문화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한, 그 흥미로운 역사
반남면 옹관고분군이 자리한 영산강 일대가 마한의 핵심이었을 것이라는 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마한 내에서의 위상이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지역이 백제화되어가는 과정에서 마한의 정치적인 입지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마한의 목지국이 백제 세력에 밀려 이동을 거듭한 마지막이 이곳이었다는 주장, 이 지역 토착세력 문화가 백제가 실효 지배를 할 때까지 남아 있었는데 독립적인 세력으로서의 그 단계는 삼국시대가 아니라 가야와 함께 5국 시대가 설정되어야 한다는 학설, 신라와 가야가 주변 지역의 소국을 병합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가 3세기이기 때문에 한반도 안에서 영호남이 큰 시차로 사회발전단계가 다를 수가 없으므로 백제의 정치적 영향 아래 문화적인 고유성을 유지한 것이라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뜨거운 이슈는 신촌리 9호분 등 반남면 일대 고분군이나 영산강 지역에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장고분, 즉 전방후원분적인 특성을 비롯한 소위 ’왜계‘ 문화적 요소에 대한 해석이다. 어떻게 이러한 문화적인 특성이 나타나게 되었을까?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멸망한 후 웅진 등 5개소에 도호부를 두었고 왜를 통치하기 위해서 대방주(帶方州)를 나주 지역에 두었는데 그 속현 중 하나가 반남면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나주 지역이 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산강 지역에 왜계 문화요소가 출현한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분분하다. 왜로 이주했던 마한계 주민들이 돌아와 만든 것이라는 학설부터 토착지역민들이 왜계문화를 받아들인 것이라는 학설, 왜계 인물들이 마한이나 백제의 신료로 거주하면서 만들었을 것이라는 설, 영산강 지역이 왜지역문화의 원류라고 주장하는 학설 등등 아직도 흥미진진하고 조심스러운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마한문화의 역동성에서 찾고 싶은 것
반남면 고분의 주인공들은 인류사에서 처음 겪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갔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다원적 그리고 다양한 문화적 요소가 융합되고 새롭게 변신하는 과정 속에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지혜가 숨어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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