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칼 지음, '오리건의 여행'
편집자주
'문송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건 인문학적 교양입니다. '문송'의 세계에서 인문학의 보루로 남은 동네책방 주인들이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춘천살이를 한 지 어느덧 3년 차다. 어느 날 대뜸 휴직하고 싶다는 남편의 말에 그러자고 했다. 서울 바깥에서 살아보자는 말에도 그러자고 했다. 남편은 휴직하기 전부터 매일 춘천살이에 대한 밑그림을 부지런히 그려나갔다. 오랜만에 생기 도는 남편 모습이 좋았지만 사실 나는 크게 설레지 않았다. 남편 생각이 좋으면 끄덕, 아니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삶의 파동이 미미했던 나는 늘 크게 반대하지도, 그렇다고 크게 반가워하지도 않으며 살아왔다. 그냥 내게 어느 운명이 다가오면 그냥 그래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 뿐이었다.
우리는 60년 묵은 작은 폐가를 고쳐 공유서재로 만들었다. 이름은 '첫서재'로 지었다. 모든 게 다 처음이었다. 온 가족이 월급 한 푼 없이 살게 된 것도, 춘천이란 도시도, 서재지기가 된 것도. 남편과 나는 하루씩 번갈아 가며 첫서재를 지켰다. 그림책 '오리건의 여행'은 그 작고 평온한 우리만의 우주에서 만났다.
책 속 주인공 듀크의 첫걸음은 내겐 무척 낯익었다. 서커스단 광대인 듀크에게, 재주를 넘던 곰이 갑자기 다가와 부탁한다. "나를 커다란 숲으로 데려다줘." 난데없는 부탁이었지만 듀크는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선뜻 곰과 길을 나선다. 듀크의 여정은 마냥 설레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곰을 숲으로 데려다줘야 한다는 뜻 모를 책임감이 그를 움직였을 테니까.
듀크의 첫걸음은 자신이 아닌 곰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그 여정에는 끊임없는 선택과 책임이 뒤따랐다. 듀크는 어느새 조금씩 자신의 생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수중에 돈은 바닥났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기 시작했고 비가 내리면 비를 맞았다. 유일하게 남은 동전 두 개로는 강 위에 물수제비를 떴다. 그렇게 곰과 함께 듀크는 처음 목적했던 곳에 한 걸음씩 닿아갔다.
'어른'이 되고 나서 나는 도리어 더 수동적인 사람이 되었다. 어릴 적엔 겁이 나도 선택하고 밀어붙일 줄도 알았다. 그런데 취직을 위해 감행했던 선택과 도전이 번번이 실패하면서 나는 자기 주도성이란 감각을 잃어버렸다. 점점 '선택'이라는 게 어려워졌고 그에 따른 책임감이 버거웠다. 그래서 선택할 일 없고 책임질 일 없도록, 생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게 되었다. 이게 순리대로 사는 것이라 믿으며.
그렇게 순리대로 온 춘천. 막연하게 서울보다는 잔잔한 삶을 누릴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막상 춘천살이는 내게 끊임없는 선택과 책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남편 꿈에 업혀 엉겁결에 된 자영업자의 삶은 매일 크고 작은 선택을 스스로 내려야만 했다. 그 책임은 온전히 우리 두 사람이 짊어졌다. 생에 이끌려 살아오다가, 생을 이끌어가는 위치에 반강제로 서게 된 셈이다. 곰과 함께 떠난 듀크처럼. 어느덧 나도 알아가고 있었다. 빚을 왕창 내어 서재를 꾸리느라 돈은 바닥났지만, 겨우 남은 동전 두 개로 강 위에 물수제비를 뜨는 듀크의 마음을.
서울에서의 삶이 불행했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아니다.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다만 생을 내가 이끌어간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모듈화된 생이 어딘가 앞에 있고 나는 그 생을 따라다닐 뿐이었다. 마흔이 되어 춘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는 직접 생을 이끌기 시작했다. 지금은 하고 싶은 걸 선택하며 산다. 그림책으로 사람들을 치유하고, 직접 글을 쓴다. 밤에는 축구를 하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운다. 그리고 돈도 번다.
'오리건의 여행'의 결말은 우리 가족의 지금과 닮았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우리는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남편 휴직은 끝났고 직장은 서울에 있기 때문에. 그러나 우린 여정을 끝내지 않기로 했다. 언제까지 우리가 춘천에 머무르게 될까? 잘 모르겠다. 다만 어떤 결론에 이르더라도 나는 그 선택을 스스로 내리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질 것이다. 나의 삶이다.
첫서재
- 문정윤 대표
첫서재는 강원 춘천시 약사동에 있는 공유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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