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전통 문화 즐기는 MZ세대들
세기말을 넘어 역사 드라마 속에서나 접했던 '고려·조선 시대' 감성이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반 출생)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①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물을 활용해 디자인 한 휴대폰 케이스가 판매율 1위에 오르고 ②자개 키링 만들기 수업 예약이 2분 만에 매진됐다. ③약과를 사기 위한 '오픈런' 행렬은 그리 놀랍지 않은 광경이 됐다.
MZ세대는 전통문화가 오히려 '힙'하다고 입을 모은다. 기성세대 눈에는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옛것'이 그들에겐 새롭고 특별하다. 박물관에 다니며 전통 불교 미술 작품 보는 것이 취미인 권민서(22)씨는 "낯익은 동시에 낯선 느낌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이례적 판매량" …MZ 사로잡은 '국중박' 케이스
전통 유물 디자인의 휴대폰 케이스가 MZ세대에게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5월 국립중앙박물관과 글로벌 휴대폰 액세서리 브랜드 케이스티파이가 손잡고 만든 테크 액세서리 컬렉션이 출시 첫날부터 온·오프라인에 구매 행렬이 이어졌다. 지난달 15일 만난 함영남(29) 케이스티파이 더현대서울 스튜디오 부매니저는 "(더현대서울 매장 기준) 출시 첫날부터 컬래버 시리즈 가운데 판매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며 "의류 브랜드 '아더에러' 컬래버 제품 한정 판매 이후 처음 겪는 이례적 상황"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국립중앙박물관 상품관에도 컬렉션 전시 상품을 보기 위한 인파가 몰렸다.
이번 컬렉션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물인 '반가사유상', '산수화훼도', '나전칠 십장생무늬 함'의 나전칠 문양 등을 활용해 디자인했다. 전통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는데 다양한 연령대 소비자들이 크게 호응했다. 20대에게는 자개 디자인, 40대에게는 산수화훼도 중 국화를 활용한 디자인이 특히 인기가 높다. 출시 다음 날 바로 자개 케이스를 샀다는 최예은(28)씨는 "자개 머리핀, 보온병 등 평소에도 자개로 만든 제품을 자주 쓴다"며 "흔하지 않지만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고 말했다.
전통 디자인 업계도 제품에 젊은 감성을 더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컬렉션 디자인을 담당한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상품기획팀 관계자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최근 젊은 세대가 새로운 중요 고객층으로 떠오르는 만큼 디자인 단계에서부터 그들의 취향과 바라는 점을 적극 고려한다"고 강조했다.
약과, 제사상 음식에서 '판매 보증수표'로
최근 전통문화 열풍의 시작점인 약과의 인기도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제사상에서나 봤던 약과가 젊은 층을 중심으로 큰 주목을 받으면서 약과 오픈런, 약케팅(약과+티케팅) 등 다양한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판매 보증 수표가 된 약과의 위상에 기업들도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3월 편의점 CU와 압구정로데오의 인기 카페 '이웃집 통통이'가 협업해 선보인 약과 쿠키는 출시 5일 만에 초도 물량 10만 개가 다 팔렸고, 현재까지 누적 판매량 120만 개를 넘었다. 이어 5월 말 출시한 '브라우니 약과 쿠키' 역시 초도 물량 10만 개가 사흘 만에 완판됐다. 전작보다 이틀 빠른 속도다. 해당 상품의 인기에 힘입어 CU는 4, 5월 약과가 속한 상온 디저트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149.8% 올랐다.
편의점 GS25는 아예 '약과 연구소'를 새로 만들고 자체 약과 브랜드 '행운약과'를 론칭했다. 지난달 1일 선보인 첫 라인업 약과 도넛과 약과 컵케이크를 시작으로 현재 여섯 가지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GS25는 연말까지 행운약과 시리즈 상품을 20종 이상으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1월 출시한 SPC그룹 던킨의 '허니 글레이즈드 약과'는 설 기간 한정 판매 제품이었지만 출시 이후 12일 만에 누적 판매량 20만 개를 돌파하며 상시 판매로 전환됐다. 이디야커피도 4일 약과 디저트 2종을 새롭게 선보였다.
약과 열풍의 주역은 단연 2030세대다. CU의 히트 상품 '이웃집 통통이 약과 쿠키'는 20대와 30대가 전체 구매자의 70% 이상일 정도로 젊은 고객에게 인기가 높다.
"2분 만에 매진" 트위터가 쏘아 올린 체험 인기
단순 구매를 넘어 이제는 전통음식, 전통공예 상품을 직접 만든다. 5월 17일 서울 종로구 돈의문박물관마을 홈페이지가 한때 마비됐다. 한옥예술체험 '예술가의 시간' 수업을 신청하려는 이용자들이 대거 몰리면서다. 한 주 뒤인 25일에는 예약 창이 열린 지 2분 만에 6월 체험 티켓이 매진됐다. 이는 돈의문박물관마을 한옥 거리에서 진행하는 전통 예술 체험 프로그램이다. 세시음식 만들기, 매듭 공예, 자개 공예 등 스무 개가 넘는 수업을 운영 중이다.
해당 프로그램의 인기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게시물 하나에서 시작했다. 익명의 누리꾼이 "떡 만들기 체험이 너무 재밌었다"는 후기와 직접 만든 수리취떡 사진 한 장을 트위터에 올렸다. 트윗이 퍼지며 전통문화에 관심 있는 MZ세대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새벽마다 예약 창에 들어가 취소표를 구했다는 20대, 체험을 위해 경기도에서 온 30대, 친구를 여럿 데리고 온 40대까지.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만난 체험객들은 모두 전통문화의 인기를 몸소 실감한다고 말했다. 약선발효꿀사탕 만들기 수업을 진행하는 강현정(55) 식약동원연구소 대표는 "어린이나 외국인 단체 관광객이 주 체험객이었지만 최근 20대 후반이 가장 많다"며 "20대 자녀가 부모님을 모시고 오기도 한다"고 전했다.
전통문화가 각광받는 이유는 새롭고 특별한 것을 추구하는 MZ세대의 성향 때문이다. 어머니와 함께 단오선(조선시대 단옷날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던 부채) 만들기 수업에 참여한 구민지(32)씨는 "막연히 외국 문화가 더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오히려 전통문화가 더 힙해졌다"고 말했다. 오전에 또 다른 박물관을 다녀왔다는 체험객 손하연(23)씨는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는 사회에서 변치 않고 꾸준히 사랑받는 전통문화의 가치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은 8~12월에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설할 예정이다.
"한국 위상 높을수록 전통 문화 더 찾을 것"
한편 전통문화 열풍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시선도 있다. 유행에 금방 싫증을 느끼는 MZ세대를 중심으로 한 '시한부 인기'일 뿐이라는 것. 그러나 MZ세대, 전문가의 의견은 달랐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도모(36)씨는 "현대 대중문화와 전통문화가 서로 영감을 주고받아 조금씩 미술·음악 시장이 넓어지는 느낌"이라며 "발전 가능성이 큰 분야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재근 대중문화 평론가는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면서 이제는 서구 문화가 아닌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자부심을 얻을 수 있는 전통문화를 찾게 된 것”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그는 "우리 고유의 정체성과 연결된 전통문화는 유행이 끝났다고 외면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라며 "한국에 대한 자부심이 커질수록 전통을 찾는 움직임도 커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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