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신고서 앞에서 망설이는 부모들
처지 다양하지만 정부 혜택 제외 많아
민간단체 도움 등에 직접 키워보지만
"매일이 위기...지원 시스템 세부화를"
편집자주
세상에 태어났지만 주민등록에도 오르지 못한 '유령아기'들이 최소 수천명에 이른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 중 일부는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부모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부모들은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을까요? 한국일보는 아이를 포기했거나 포기하려 했던 부모들을 취재해, 그들이 임신·출산의 순간에 마주했던 절박한 상황을 확인했습니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요?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전 자신이 없네요.
올해 1월 김송아(가명·34)씨는 서울 관악구의 언덕길을 힘겹게 올랐다. 산부인과에서 퇴원한 직후, 갓 낳은 아이를 안고 도착한 곳은 주사랑공동체가 운영하는 베이비박스였다. 도저히 키울 수 없는 아이를 여기 두면, 뭔가 대책을 마련해 준다고 들었다.
남들은 천륜을 끊은 모진 엄마라 손가락질 하겠지만, 아이와 헤어질 수밖에 없던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교제하던 남성(아이의 생부)은 임신 사실을 알리자, 곧장 종적을 감췄다. 가족과 친구들에겐 눈총을 받을까봐 임신과 출산을 알리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그 와중에 사기까지 당하는 바람에,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 입양기관에 아이를 보내는 것도 고려했지만 출생신고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그렇게 베이비박스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이 작은 아이를 두고 갈 수 있을까. 내가 이 아이 없이 살 수 있을까. 아니 이 아이와 함께 살 수 있을까. 이윽고 김씨는 박스를 열고 아이를 내려 놓았다.
아이를 떼어두고 온 엄마의 심정
생후 일주일 아기를 떼놓고 온 엄마는 일당 받는 일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틈틈이 걸려오는 주사랑공동체 사람들 전화를 통해 아이 소식을 들었다. "엄마 고생했어요. 아기가 정말 예쁘네요." 힘들게 열달을 키워 출산하기까지 친구·가족 아무에게도 들을 수 없었던 말. 칭찬과 찬사를 거기서 처음 들었다.
그렇게 아이를 그리며 살다보니, 김씨는 문득문득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됐다고 한다. 작은 집에서나마, 그 아이와 함께 밥을 먹고, 껴안고 깔깔거리면서 함께 사는 상상.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단다. 상담 끝에 김씨는 한 달 반 만에 베이비박스에서 아기를 찾아왔다. 그리고 출생신고를 했다.
각오는 했지만, 현실은 상상처럼 행복한 모습이 아니었다. 일단 집 구하기부터 난관이었다. 예치금 60만 원에 월세 57만 원인 '무보증 원룸'에 겨우 자리를 잡았으나, 집주인은 보증금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전입신고를 못하게 했다. 결국 '주거 불명자'로 분류된 탓에 생계·주거급여나 한부모가정 지원 제도에 신청조차 할 수 없었다. 주민센터에 도움을 요청해도 "빨리 전입신고부터 하라"는 말뿐이었다.
지금 김씨와 아기는 양육수당과 부모급여 월 80만 원, 주사랑공동체가 보내주는 물품 후원만으로 생계를 꾸린다. 김씨는 29일 본보화의 통화에서 "혼자 키우는 스트레스와 생활비 걱정에 힘이 많이 든다"며 "아이를 두고 온 때로 돌아간다면 지금과 다른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속을 털어놓았다.
사회적 시선·경제적 압박감 해결해야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유령아동'이 수천명에 달한다는 감사원 감사 결과가 알려지면서, 출생통보제(의료기관이 지자체에 의무 통보)와 보호출산제(임신부가 신원 노출 없이 아이를 낳은 뒤 지자체에 인도) 법제화에 속도가 붙었다. 하지만 아이 양육을 포기할 고민까지 하다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아이와 함께 사는 부모들은 "그런 제도가 생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당사자들은 사회적 시선 탓에 임신부터 엄청난 압박에 시달린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체계적 지원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김송아씨는 "임신중절수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임신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못했기에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며 "혼자 끙끙 앓다보니 극단적 선택을 생각할 정도로 심리적 부담만 커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가 혼자 3살 아이를 키우는 최모(24)씨도 "갓 태어난 아이와 둘이 남겨졌을 때 정말 함께 죽는 방법밖에 없는 건가 막막했다"고 떠올렸다.
경제적 문제도 천륜 앞에서 이들을 갈등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지난해 아이를 출산 후 컨테이너박스에서 몇달을 지냈다는 미혼모 이모(37)씨는 "여름이라 습기가 너무 많아 온 집안에 곰팡이가 피고 아이 피부에까지 옮겨오더라"며 "당장 주거 문제부터 해결해야하는 처지지만 밤낮없이 육아를 혼자 도맡으며 주거 자금까지 마련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상황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 처했지만 가족·친지의 도움도, 정부가 내민 구원의 손길도 받지 못했다. 주민센터에서 거듭 도움을 받지 못하고 막막해 하는 김송아씨에게 전화를 걸고 안부를 묻는 곳은 주사랑공동체뿐이라고 한다. 김씨가 아이를 버리려던 바로 그곳이다. 미혼모 이씨와 최씨도 "아이 처지를 위해 가제수건 한 장까지 챙겨주는 곳은 주민센터가 아니라 민간단체였다"고 했다.
김민정 한국미혼모가족협회 대표는 "불안한 상태의 위기 임산부가 직관적으로 구조 요청을 할 수 있는 정부 창구가 뚜렷하지 않고 홍보도 부족하다"며 "주민센터나 정부콜센터를 통해 지원 제도를 안내 받았다고 해도 실제 혜택을 받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다급하게 민간에 손을 뻗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출생통보제·보호출산제 논의와 별도로, 위기의 부모들이 처한 다양한 난관을 고려한 세심하고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많다. 김민정 대표는 "위기를 이겨내고 아이를 책임지기로 마음먹게 하기까지는 한두 가지 지원만으로는 역부족"이라며 "임신을 한 시점부터 출산 이후까지 부모를 돕는 세세한 지원이 먼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황민숙 주사랑공동체 위기영아보호상담지원센터장도 "베이비박스를 찾는 엄마들만 해도 처한 환경이 정말 각양각색"이라며 "상담, 주거, 양육 지원까지 부모가 아이를 보호하는 데 이어 가정이 자립할 수 있도록 탄탄한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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