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외국인 가사도우미, '식모'의 부활
10년도 훨씬 전, 박사 과정 시절의 일이다. 여성학적 관점에서 노동을 다루는 수업을 이끌던 교수는 일의 세계는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며 짧은 기간이라도 직접 해당 노동을 할 수 있는 연구주제를 선정할 것을 주문했다. 나는 호기롭게도 ‘가사노동자의 일’을 연구주제로 선정했다. 여성이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수행하는 무임의 가사노동에 대한 문제의식에 열을 올리고 있던 시절이었다. 더불어 무임의 가사노동이 시장에서 상품화되는 양상이 궁금해졌다. 마침 당시 가사서비스 시장은 YWCA와 사설직업소개소 등 기존 중개업체들이 장악하고 있던 지형에 온라인 업체들이 생겨나면서 균열이 일고 있었다.
동네에서 봐 뒀던 직업소개소를 먼저 방문했다. 직접 오려낸 듯한 셀로판지가 인상적이었던 ‘파출부 소개해드립니다’라는 문장이 창문에 붙어 있었다. 지친 얼굴의 남성은 파출부 일을 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마음의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던 나는 해 본 적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말았고 그러자 그는 결혼은 했냐고 물었다. 그가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낼 때 나는, 결혼했다고 혹은 결혼한 적이 있다고 말해야 이 노동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사실의 발설이 0.05초쯤 빨랐다. 그다음 업체에서도 이 과정을 반복했다. 나는 ‘파출부 소개해드립니다’의 세계에 나를 들여놓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온라인 업체로 눈을 돌렸다. 이들은 기존 알선업체들이 ‘파출부 아줌마’를 연결해줬다면 자신들은 전문 서비스직으로서의 노하우를 갖춘 ‘가사관리사’를 소개해준다며 자신들을 차별화했다. 이력서를 제출하라는 것부터가 동네 직업소개소들과는 달랐다. 박사 과정이라고 하면 왠지 안 될 것 같아 대졸이라고 썼다. 그 이력서를 들고 면접까지 봤는데 첫 번째 질문은 ‘대졸이 왜 이런 일을 하려고 하느냐’였다. 당신네 회사의 비전대로 가사관리사는 앞으로 전문 서비스직으로 전망이 무궁무진하다고 본다고 대답했다. 담당자가 웃으며 "생각하는 그런 일 아니고 파출부 일"이라고 대답한 것이 또렷이 기억난다. 그리고 또 다시 받은 그 질문. “결혼은 하셨나요?” 결혼 안 하냐고 묻는 친지들 앞에서 한껏 당당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훈련된 탓인지 ‘결혼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 누가 가사노동자가 여성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나. 결국 ‘가사노동자의 노동 경험’에서 ‘가사서비스 제공 업체들 간 차이를 통해 본 가사노동 상품화 양상’으로 연구방향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가사근로자법, 근로기준법 11조, 그리고 외국인 가사도우미
이처럼 가사노동자의 일은 다른 임금노동과 유사한 일이라기보다 기혼 여성의 성역할의 연장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사회적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가사노동자들과 관련 단체들은 노동은 하는데 노동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불합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오랫동안 싸워 왔다. 노력은 2021년 5월 21일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가사근로자법) 국회 통과로 결실을 맺은 듯 보였다. 그러나 이 법은 ‘가사근로자’를 ‘가사서비스 제공기관의 사용자와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이용자에게 가사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안고 출발했다. 즉 ‘가사근로자법’에서 규정하는 인증을 받은 업체에 속해 있는 이들만을 이 법상의 ‘가사근로자’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업체에 속해 있지 않거나 인증을 받지 않은 업체에 속해 있는 가사노동자들은 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여전히 중개업체를 통해 이용자 가정을 소개받아 일하는 가사노동자들이 많고 새롭게 생겨난 플랫폼 업체들은 중개업을 표방하며 인증받기를 꺼리는 상황을 감안하면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노동에 관한 기준법인 한국의 근로기준법은 11조에서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이에 ‘가사 사용인’을 포함한다. 가사노동자에게 일을 시키는 사용인이 근로기준법상 사용자 의무와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가사노동자들과 관련 단체들이 근로기준법에서 가사 사용인 적용 배제 조항을 삭제하라고 요구해 온 이유다.
상황이 이러한데 지난 3월 시대전환 소속 조정환 의원은 외국인 가사노동자의 최저임금법 적용 배제를 골자로 한 가사근로자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루 만에 철회하긴 했지만 곧이어 재발의한 상태다. 고용노동부는 ‘고용허가제’라 불리는 비전문 취업 비자(E-9) 허용 업종에 가사노동자를 추가하겠다고 발표했다. 작년 9월 오세훈 서울시장이 국무회의에서 외국인 가사노동자 도입을 제안한 이후 전방위적으로 속도를 내고 있는 모양새다. 서울시는 올해 하반기 100명의 외국인 가사노동자를 가정과 연결시키는 시범사업도 실시할 예정이다. 많은 언론과 전문가, 시민들이 남성이 여성과 함께 돌봄노동을 할 수 있는 정책 방안과 문화의 변화를 주문했건만 안중에도 없다.
식모의 부활
외국인 가사노동자에게도 기혼 여부를 따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가사노동자의 일이 기혼여성의 성역할의 연장으로 간주되는 것은 같은 국적과 인종일 때다. 인종과 국적이 다른 (정확히 말하자면 후진적이라고 여겨지는) 경우 바로 그 이유로 정식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사 일을 하기에 적당하다고 간주된다. 전근대 시절에는 노비나 하녀, 하인이라는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근대 이후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는 인종이 다른 노예들이 했던 일이라는 역사적 유산이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 또한 조선시대 식비(食婢)에서 연원한 식모의 역사가 있다. 1800년대 말 노비 해방 이후에도 식모는 살아남았고 일제강점기에는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10대의 어린 여성들이 대거 식모가 되었다. 일제의 수탈로 황폐해져가는 농촌을 떠나 근대화된 도시로 떠난 그녀들을 필요로 한 이들은 바로 내지인(內地人), 즉 일본에서 조선으로 이주해 온 일본인들이었다. 1876년 개항 당시만 해도 54명에 불과했던 조선의 일본인들은 1910년대 후반에 이르면 34만 명으로 증가했고 해방 직전에는 75만 명에 이르렀다. 조선의 일본인 가정은 보통 음식과 전문적인 가사일을 하는, 나이가 좀 든 여성과 그 외 가정의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어린 식모를 고용했다. 농촌에서 온 어린 여성들이 많아지면서 식모 고용 비용은 한없이 내려갔다. 일본어를 할 수 있는 경우에는 다른 이들보다 좀 더 돈을 받았다. 부유한 조선인 가정도 농촌 출신의 식모 한두 명을 두는 것은 예사였다. 1930년대 전 사회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면서 식모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식모의 인권과는 무관한 주장이었다. 군수 물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 한 명의 인력도 아쉬운 마당에 식모나 식모를 둔 여성들이 너무 한가하다는 비난이 핵심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시기에 더욱 증가한 식모들은 1960년대까지 일상적인 존재였다. 주인집에 함께 살면서 출퇴근 시간이랄 것도 없이 24시간 대기 상태에 놓여 있던 이들은 정해진 임금을 받기보다 ‘시집갈 때 돈 해 주겠다’는 말을 믿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구타와 성폭력뿐 아니라 임신과 낙태도 빈번했다. 지친 그녀들이 유괴나 도둑질을 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1960, 70년대 본격적인 산업화와 이에 따른 핵가족화는 식모들을 가족을 위협하는 존재로 이미지화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1960년 개봉한 영화 '하녀'는 당시 식모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을 구체적으로 그려내 화제를 모았다. 1930년대와 유사하게 식모를 둔 가정주부들의 한가함을 비난하고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담론들이 득세하면서 식모 시대는 막을 내렸다.
역사가 변형되어 반복되는 사태를 자주 목격하는지라 식모의 역사도 흘러간 옛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인종과 국적이 ‘낮다’고 여겨지는 여성들은 한국어 구사능력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을 것이다. 최저임금제를 적용한다니 최저임금이 상한일 것이다. 외국인 가사노동자가 피해자인 많은 사건들을 단신기사로 접할 것이고 그녀들이 범죄를 저지른 사건은 몇 날 며칠 1면 기사로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여성들을 도와 출생률을 높일 것이라 기대한다니 그렇지 않은 경우(2020년 기준으로 외국인 가사노동자 제도를 운영하는 홍콩은 합계출생률 0.87명, 싱가포르는 1.1명으로 한국의 0.84명과 수위를 다툰다) 그 화살은 외국인 가사노동자를 두고도 아이를 낳지 않는 한국 여성들에게로 향할 것이다. 피해의식이라고? 우리는 이미 ‘맘충’의 시대를 산 지 오래이지 않은가.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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