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영아살해·유기 판결문 4년치 분석
범행 이유로 ‘경제적 어려움’ 57% 최다
수치심에 가족에게 못 알리고 화장실 출산
편집자주
세상에 태어났지만 주민등록에도 오르지 못한 '유령아기'들이 최소 수천명에 이른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 중 일부는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부모에게 죽임을 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 부모들은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을까요? 한국일보는 아이를 포기했거나 포기하려 했던 부모들을 취재해, 그들이 임신·출산의 순간에 마주했던 절박한 상황을 확인했습니다.
김소은(가명)씨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건 2019년 12월쯤이다. 수개월 전 동갑내기 친구와 사귀다가 덜컥 아이가 생겼다. 산부인과에 임신중절 수술 문의도 해봤지만, 임신 4개월이 지나 어렵다는 얘기만 돌아왔다. 시술 비용도 없었다. 김씨는 결혼하지 않은 상황에서 임신했다는 게 부끄러웠다고 한다. 부모님을 실망시킬까 두려워 가족에게도 숨겼다.
김씨는 결국 2020년 4월 22일 자정쯤 경기 광주시 자택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다. 울음소리를 가족들이 들을까봐 두려워 아기의 코와 입을 막았다. 그래서 아기가 죽었다. 김씨는 다음날 사체를 쇼핑백에 담아 현관문 밖 옥상으로 연결된 계단에 숨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씨의 어머니가 경찰에 신고하면서, 비로소 김씨의 임신과 출산을 세상이 알게 됐다. 김씨는 2020년 9월 영아살해와 사체유기 혐의가 인정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김소은씨 사례는 영아살해 사건의 '전형적 모델'이다. 영아살해·유기를 저지른 이들의 절반은 임신 사실을 가족에게 숨겼고, 49%는 출산 장소로 화장실을 택했다. 그들은 아이를 양육할 돈도 없었다. 29일 한국일보가 2019년 3월부터 2023년 6월까지 4년 동안 발생한 영아살해·유기 사건 판결문 47개를 확보해 분석한 결과다.
영아살해·유기한 이유를 살펴보니 '경제적 어려움'(57.4%·복수응답 허용)이 가장 많았다. '수치심과 두려움'이 51.1%로 뒤를 이었고, 남자친구 등과 관계 단절을 우려했다는 경우도 10.6%였다. 평소 몸과 마음이 아파 양육을 포기한 경우는 6.3%에 불과했다. 이렇게 경제적 어려움은 영아살해와 유기라는 극단적 상황을 불러오는 '결정적 트리거'다.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남자와의 사이에서 원치 않는 임신을 한 박가영(가명)씨도 2019년 6월 9일 자신의 집에서 아이를 낳은 뒤 살해했다. 경제적 사정으로 산부인과 진료도 못 받다가 6개월 미숙아를 출산하자 벌인 짓이다. 재판부는 박씨에게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며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점을 양형 사유로 고려했다고 밝혔다.
가족도 울타리가 되진 못했다. 이들은 가족이 비난할까 두려워, 원치 않는 임신 사실을 숨겼다. 실제로 영아살해 피고인들의 48.9%가 임신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고, 단 12.8%만이 가족과 이 사실을 공유했다. 숨길 수밖에 없었던 건 결혼하지 않아서다. 영아살해·유기 피고인의 혼인 여부를 조사했더니 미혼이 53.2%로 가장 많았다. 살해·유기된 영아의 생부는 남자친구(23.4%)가 가장 많았고, 전 애인과 배우자를 포함한 지인이 21.2%, 모르는 사람 19.1%였다. 배우자는 4.3%에 그쳤다.
숨겨야만 했기에, 아이들이 태어난 장소도 비극적 공간이었다. 화장실이 48.9%로 가장 많았는데, 몸을 숨길 수 있고 곧바로 몸을 씻을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주거지 등 실내공간이 23.4%, 병원이 12.8%였다. 유기 장소로는 공터 및 야산(17%)이 가장 많았고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맡긴 사례는 12.8%였다.
피고인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영아살해가 42.6%로 가장 많았다. 영아유기 40.4%, 사체유기 25.5%, 영아유기치사 8.5%, 영아살해미수 4.3% 순이었다. 형량을 보면 실형은 23.4%에 그쳤고, 집행유예가 70.2%로 대부분이었다. 선고유예, 무죄, 벌금 300만 원도 각각 한 건씩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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