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춘 '시험능력주의: 한국형 능력주의는 어떻게 불평등을 강화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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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변해야 개인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때로 어설픈 희망을 품기보다 ‘사회 탓’ 하며 세상을 바꾸기 위한 힘을 비축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민낯들' 등을 써낸 사회학자 오찬호가 4주에 한 번 ‘사회 탓이 어때서요?’를 주제로 글을 씁니다.
'킬러 문항(대학수학능력시험의 초고난도 문항)'은 존재 자체가 한국 교육의 모순을 증명하기에 당연히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도려내기 전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킬러 문항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학원에, 그것도 ‘의대를 목표로 하는 전문학원’에 오랫동안 의존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가 출제되어 공교육이 엉망이 된 게 아니라, 사람을 솎아내는 경쟁이 별다른 제어 없이 축적되니 아무나 풀어서는 안 될 문제가 등장한 것이다. 봉사활동조차 취업 스펙이 되니, 이왕이면 해외 그것도 오지에서의 극한체험이 강력한 변별력을 지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정부의 킬러 문항 박멸 의지는 사회문화 전체와 연결되어야 한다. 교육부와 사교육의 '짜고 치는 고스톱'을 수사해 반드시 물증을 찾겠다는 식의 접근은 나무만 보겠다는 협소함과 숲을 볼 줄 모르는 무지함을 증명하는 꼴이다. 경쟁이 과잉될 때 나타나는 괴기한 현상을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걸 개탄하지 않고 시험문제의 난이도에서만 공정성을 찾는 건 출발부터가 틀렸다. 이런 교육철학 없이 전개되는 킬러 문항 삭제는 능력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인 ‘모두가 같은 조건이라면, 성적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다’는 식의 인식을 더 범람케 한다. 교육을 바로잡겠다는 건, 한국식 입신양명이 타인을 혐오하는 연료로 작동되었음을 인정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사회학자 김동춘은 '시험능력주의'에서 시험결과가 곧 신분 자체가 되는 한국 사회의 역사성을 짚으며, 승자와 패자로 구분되는 입시용 공부가 어떤 사회적 부작용으로 이어지는지를 조목조목 짚는다. 시험 하나에 인생이 결정되기에 ‘시험은 공정해야 한다’는 투박한 틀을 깨고, 인간의 존엄성이 시험성적에 크게 좌지우지되는 자체가 ‘정의롭지 못한 사회’라는 결론은 “서울대 법대, 사법고시 출신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었다”로 시작하는 책의 첫 문장과 짜릿하게 연결된다.
능력주의를 토양 삼아 성장한 엘리트들은 기회가 균등한 경쟁의 결과가 차이를 넘어 차별로 뻗어나가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데, 더 심각한 건 인류 역사에서 한 번도 가능하지 않았던 ‘기회의 균등’이 같은 날 동시에 엄격하게 치르는 시험제도로 보장된다고 믿는다는 거다. 시험이라는 거대한 용광로 안에 불합리한 개별적 상황을 쑤셔 넣어버리니 그 끝에는 ‘개인 노력부족’의 증거라면서 패자를 조롱하고 노동을 천시하는 문화가 당당히 형성된다.
이를 옹호하는 게 카르텔인데, 윤석열 정부의 탄생에 없었던 정서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의아하다. 공교육 정상화는 스타강사 세무조사로 복원되는 게 아니다. 공부할수록 사람을 깔보는 괴상한 논리를 파괴하는 것이고, 수치심을 느낀 이들이 일하는 노동현장의 열악함을 직시하고 개선해야 가능하다. 이를 외면하고 시험 형태만을 지지고 볶으며, 최저임금은 차등 적용하겠다면 이야말로 ‘교육이 무너진’ 객관적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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