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진적 변화 반도체와 달리 판도 확 바뀌어
합작사·경쟁사 소송 등 분쟁 대비 목적도
응용 분야 확대 발맞춘 특허 전략 필요성
배터리 산업은 우리나라의 미래 먹거리라는 점에서 '제2의 반도체'라 불리지만, 반도체 산업과 성장 방식이 매우 다르다. 기술에 독점권을 부여하는 특허를 많이 확보하는 전략이 특히 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반도체는 집적도, 배터리는 화학원료가 핵심
반도체 산업이 성장하려면 반도체의 집적도를 물리적으로 높이는 공정 기술을 점진적으로 끌어올리는 게 핵심이다. 그래서 삼성전자, 대만의 TSMC는 반도체 회로 선폭을 나노미터(㎚, 1nm=10억 분의 1m) 단위로 줄이는 경쟁을 한다. 반면 배터리 산업은 배터리에 들어가는 화학 원료를 교체해 기술의 판도를 확 바꾸는 방식으로 성장한다.
강기석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여러 기업이 당장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것과 상관없는 차세대 배터리 특허를 많이 출원하고 있는데, 리튬메탈 배터리·나트륨이온 배터리 등 종류도 다양하고 정답도 정해져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차세대 배터리 기술을 미리 확보해놓지 않으면, 시장이 바뀌었을 때 아예 기회를 잃게 되기 때문에 기업으로선 되도록 많은 특허를 선점하는 데 매달리는 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배터리 기업들이 완성차 업체와 활발하게 전략적 제휴를 하거나 합작회사를 설립한다는 점도 특허의 중요성과 관련이 깊다. LG에너지솔루션은 현대·기아차, GM, 혼다와 합작사를 설립했다. 삼성 SDI와 SK온도 각각 스텔란티스, 포드와 합작사를 꾸렸다. 특허청 관계자는 "배터리 경쟁에서 뒤처진 해외 완성차 업체들은 배터리 기술의 노하우를 취득하지 못하면 계속 배터리 생산업체들에 종속돼야 하는 입장"이라면서 "협력 중인 완성차 업체와 향후 이견이 발생할 경우 기술 독점권을 확실히 선언하려면 특허 확보가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특허 많을수록 보상액 줄어들 가능성
배터리 업체끼리 소송전이 종종 발생하는 것도 기업들의 특허 출원을 자극한다. 2011년 SK이노베이션과 LG화학이 배터리 분리막 기술 특허 침해 여부를 두고 수년간 법정 공방을 벌인 게 대표적이다. LG화학은 중국 CATL의 전신인 ATL을 상대로 한 해외 특허 소송전에서 이겨 천문학적 규모의 로열티(특허 사용료)를 확보한 적도 있다.
이영기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 스마트소재연구실장은 "두 기업이 소송을 벌일 때 한쪽이 원천성을 가진 특허를 보유하고 있더라도, 상대가 유사한 특허를 많이 보유하고 있으면 물어줘야 할 보상액을 줄일 수 있다"면서 "당장 특허 보유가 수익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미래에 벌어질 복잡한 경쟁과 소송에 대비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배터리 기술 응용 분야가 지속적으로 넓어지고 있기 때문에 특허 확보 중요성 역시 함께 커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김동욱 한국화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리튬 배터리는 처음 일본에서 캠코더, 노트북 등 소형 전자기기에 쓰이다가 전기차에 적용되면서 활용도가 크게 넓어졌다"면서 "응용 제품군이 늘수록 이에 발맞춘 기술 발전과 특허 출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배터리 기술은 앞으로 항공, 열차, 선박 등 활용 분야가 크게 확대될 것으로 업계는 내다보고 있다.
◆배터리 관련 용어 설명◆
-이차전지: 충전과 방전을 여러 번 반복할 수 있는 전지. 흔히 '배터리'로 불린다. 한 번 방전되면 다시 충전할 수 없는 '일차전지'와 구분된다.
-리튬 이온 배터리: 리튬 이온을 이용해 충·방전을 하는 이차전지. 에너지 용량 대비 가벼운 것이 장점으로, 휴대폰·노트북·전기차 등에 널리 쓰이는 가장 상용화한 이차전지다. 양극·음극·분리막·전해질로 구성된다. 양극에 있던 리튬 이온이 음극으로 이동하면서 배터리가 충전되고, 음극에 있던 리튬 이온이 양극으로 이동하면서 방전된다.
-양극: 리튬 이온이 들어가는 공간으로, 양극재가 용량·전압 등의 배터리 성능을 결정한다.
-음극: 양극에서 나온 리튬 이온을 저장, 방출해 전류를 흐르게 한다. 흑연·실리콘 등이 음극재로 쓰인다.
-분리막: 양극과 음극이 물리적으로 섞이지 않도록 하는 막. 미세한 구멍이 있어 리튬 이온만 이동할 수 있다.
-전해질: 양극과 음극 사이에서 리튬 이온이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 현재 상용화한 리튬 이온 배터리는 액체 전해질을 사용한다.
-NCM 배터리: 세 가지의 양극재를 조합한 '삼원계' 배터리의 한 종류. 리튬·코발트 산화물에 니켈·망간을 더한 양극재를 쓴다. 니켈 비중이 클수록 에너지 밀도가 높고 주행 거리를 늘릴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이 주력으로 삼고 있다.
-LFP 배터리: 리튬·인산·철을 양극재로 쓰는 배터리. 에너지 밀도가 낮고 주행 거리가 짧지만, 가격 경쟁력이 높아 중국이 주로 생산한다.
-전고체 배터리: 기존 리튬 이온 배터리의 분리막과 액체 전해질을 고체 전해질로 바꿔 안전성을 높인 배터리. 일본 도요타가 상용화에 도전하고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