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강소기업]<6> 충북 진천 'ABC써클'
세계 유일 토양병 진단 키트 '진단이' 개발
신속·정확 진단으로 전염병 확산 조기 차단
치료법 없는 '바나나병' 연구 투입, 큰 기대
편집자주
지역경제 활성화는 뿌리기업의 도약에서 시작됩니다. 수도권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고군분투하는 전국의 뿌리기업 얘기들을 전합니다.
지난 5월 콜롬비아 산타마르타에서 열린 ‘제1회 카리브해 바나나 포럼’. 멸종 위기의 바나나를 살리기 위해 전 세계 전문가와 기업이 머리를 맞댄 국제 회의다. 이날 포럼장에 몰린 세계 각국의 바나나 연구진과 기업인들의 관심은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한국 중소기업에 쏠렸다. 주인공은 토양 전염병 진단ㆍ치료 전문 업체인 ‘ABC써클(대표 박인서)’. 특히 이 업체의 진단 키트 개발품인 ‘진단이’에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다. 바나나 감염병 최고 권위자인 케마(네덜란드) 박사는 강연에서 “바나나 병을 추적하고 조기 진단하는 연구에 한국산 진단 키트를 활용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바나나 전염병 퇴치를 위한 다국적 연구팀이 ABC서클의 참여를 제안한 사연도 전했다.
"바나나병 전염 전 차단"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나나는 몇 년 뒤면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바나나를 썩게 만드는 ‘파나마병’ 때문이다. 50~60년 전에도 파나마병이 창궐해 ‘그로 미셸(Gros Michel)’ 이란 품종의 바나나를 멸종시킨 적이 있다. 업계는 ‘캐번디시(Cavendish)’ 품종이 저항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대량 재배에 나섰다. 현재 우리가 먹는 바나나가 이 품종이다. 그러나 다시 ‘신파나마병(TR4)’이 등장했다. TR4는 필리핀 바나나를 초토화시킨 데 이어 중국 인도, 중동. 아프리카로 급속히 번지고 있다. 최근엔 마지막 보루로 여겼던 남미까지 상륙해 위기감이 극에 달한 상황이다. 이에 각국이 “해법이 시급하다”며 남미 바나나 주산지인 카리브해 연안에 모인 것이다.
이 감염병은 치료법이 없다. 일단 번지면 그대로 고사된다. 전염되기 전 미리 차단하는 게 유일한 해법이다.
진단이의 가장 큰 장점은 신속하게 전염병 감염 여부를 판별해 초기에 병균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엔 채취한 식물을 전문가에 맡기고 실험실에서 균 배양과 DNA 증폭 시험을 거치는 데 3주나 소요됐다. 이 기간 병은 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결국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반면 진단이는 10분이면 결과가 나온다. 임신 진단키트나 코로나19 신속항원키트처럼 기기에 나타나는 줄로 판별하는데 사용법도 간단하다. 식물 뿌리 부근의 흙을 채취해 병원균을 찾는 전용 시약에 넣고 흔든 뒤 액체 몇 방울을 떨어뜨리면 된다. 병균 진단 적중도는 95% 이상이다. 박인서 대표는 “진단이는 저렴하고 조작이 간단해 비전문가인 농민들도 영농 현장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다”며 “신속한 진단으로 맞춤형 방제를 하면 농약 사용을 크게 줄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5년 연구 끝 토양병 진단키트 개발
충북 진천군에 둥지를 튼 ABC써클은 박 대표가 맨손으로 일군 회사다.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익혔다. 밭을 매고 일구면서 “농사가 잘 되려면 토양이 좋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그래서 농대를 졸업한 뒤 유전자와 미생물학으로 석ㆍ박사 과정을 마쳤다. 농미생물 업체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마흔 살이 된 2015년 퇴사해 ABC써클을 설립하고 기능성 비료 개발에 착수했다. “땅을 건강하고 기름지게 살릴 해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자금이 부족한 그는 ‘선 주문 후 제작’ 전략을 썼다. 먼저 제품을 구상해 상품안내서(카탈로그)를 만든 뒤, 해외 바이어에 소개하고 주문이 오면 설비를 갖춘 기업에 의뢰해 수출하는 방식으로 회사 브랜드를 키워갔다.
토양병 진단 키트 개발은 캄보디아에 기능성 비료를 수출한 게 계기가 됐다. 2016년 비료를 수입한 캄보디아 후추나무 농장에서 “비료를 줬는데, 되려 나뭇잎이 시들해졌다”는 연락이 왔다. 박 대표는 곧바로 캄보디아로 날아가 조사를 벌였다. 알고 보니 후추나무 뿌리에 병이 들어 있었다. 흙 속에 퍼져 있던 병균 때문에 병이 광범위하게 퍼진 것이었다. 이 때 그는 토양병의 조기 진단 필요성을 절감했다. “몸이 아프면 먼저 어떤 병인지 알아야 하듯, 작물도 땅속 바이러스를 조기 진단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거죠.”
간편하고 신속한 자가 진단법을 궁리하던 그는 갓 결혼한 조카가 진단 키트로 임신을 알게 됐다는 얘기에 무릎을 쳤다. 묵묵히 연구에 매진한 지 5년 만인 2021년 3월 진단이를 개발해 특허를 출원했다. 토양에서 식물병을 찾는 세계 유일의 진단 키트는 이렇게 탄생했다.
해외서 폭발적 관심
해외에서 진단이의 진가를 먼저 알아봤다. 유튜브 등으로 제품을 접한 해외 바이어와 농장주들의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지난해 4월에는 케마 박사 연구팀이 바나나 감염병 연구에 쓰기 위해 항공 화물로 진단이 수십 세트를 공수해갔다. ABC써클은 현재 동남아시아와 남미, 아랍 등 세계 10여개국과 수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진단이는 점차 진화하고 있다. 기본적인 토양병부터 각종 작물 질병, 식물기생 선충 등을 판별하는 8가지 제품이 개발됐다. 업체 측은 토양 속의 모든 병원균을 찾아낼 수 있는 다목적 키트, 과수에 치명적인 과수화상병 등을 조기에 찾아낼 수 있는 키트도 연구 중이다. 박 대표는 “안전한 먹거리는 건강한 토양에서 나온다”며 “다목적 진단 키트를 만들고 친환경 유기농 약제까지 개발하는 게 목표”라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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