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서 여성 폭행, 납치 시도 남성
경찰, 긴급체포 대신 자진출석 요구
"신원 확보... 피의자 인권 고려해야"
"형식 매몰되지 말고 사안 특성 봐야"
아파트에서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도주한 남성이 구속됐다. 경찰은 폐쇄회로(CC)TV 조사를 거쳐 범인을 특정하고도 ‘긴급체포’ 대신 가해자에게 ‘자진출석’을 요구했다. 피의자 인권을 감안해 절차를 따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건 발생부터 인신 구속까지 피해자는 열흘간 2차 가해 등 보복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17일 경찰에 따르면, 이달 3일 0시쯤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서 A씨는 집에 들어가려던 20대 여성을 강제로 비상계단으로 끌고 갔다. “죽기 싫으면 따라오라”는 협박에도 피해자가 소리를 지르는 등 계속 저항하자 달아난 것으로 알려졌다.
소란에 이웃이 신고했고, 출동한 경찰은 CCTV 분석을 통해 A씨의 신원과 주거지 등을 알아냈다. 하지만 뚜렷한 범죄 혐의에도 경찰은 그를 긴급체포하지 않고 전화로 경찰서에 출두하라고 요구했다. 피의자는 사건 발생 나흘 뒤인 7일에서야 경찰서에 가 변호인과 함께 조사를 받았다. 이후 경찰은 조사 내용과 피의자 진술 등을 토대로 10일 간음 목적 약취ㆍ유인(미수) 혐의로 A씨의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13일 영장이 발부됐다. 범행부터 신병확보까지 꼬박 열흘이 걸린 셈이다.
CCTV에 범행 장면이 그대로 담겨 있었지만, 경찰이 바로 범인의 신병을 확보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사건을 수사한 서울 노원경찰서 관계자는 “긴급체포를 하기엔 법리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해명했다.
실제 올해부터 시행된 ‘경찰 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을 보면, 경찰은 자진출석한 피의자를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긴급체포해선 안 된다고 돼 있다. 법원도 긴급체포 요건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추세다. 가령 2016년 경남 창원에서 검찰이 마약 투약 피의자를 자택에서 긴급체포한 사건과 관련해 법원은 “이미 (피의자) 신원이 파악돼 ‘긴급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경찰 관계자는 "자진출석 의사를 물어보는 것도 수사 기법의 하나”라며 “출석에 불응했다면 체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이 피의자 인권 보호 형식에 매몰돼 사안의 중대성과 긴급성을 너무 가볍게 여긴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적지 않다. 형법상 약취ㆍ유인죄 형량은 징역 1년 이상 10년 이하다. 사안에 따라 긴급체포 조건인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죄’에 포함될 수도 있다. 법률사무소 진서의 민고은 변호사는 “자진출석을 약속했다고 도주나 증거인멸 염려가 없다고 단정하긴 어렵다”며 “사건 특성을 면밀히 파악해 인권보호 규칙에 나오는 ‘특별한 사유’를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