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와 레오시 야나체크의 만남
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지난 11일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가 타계했다.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느림', '정체성', '웃음과 망각의 책', '불멸', '향수' 등을 발표하며 인간 실존의 복잡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온 그는, 정작 자신을 향한 세상의 관심과 원치 않는 판단받기를 꺼려해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다행히 남아 있는 귀한 자료가 있는데 1983년 미국 문학 계간지 '파리 리뷰'에 실린 프랑스 문학평론가 크리스티앙 살몽과의 대화다. 쿤데라가 음악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사랑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인상적 자료다.
이 인터뷰가 담긴 책 '작가란 무엇인가'(다른 발행)에 따르면 파리에 있는 밀란 쿤데라의 작은 방 책장에는 철학책과 음악책이 가득 차 있고 책상에는 두 장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아버지의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체코 작곡가 레오시 야나체크의 사진이었다. 아버지 루드빅 쿤데라가 체코 야나체크 음악원 피아노과 교수였으니 작가의 책상에는 일생 존경하고 사랑한 두 음악가의 사진이 있었던 셈이다.
쿤데라는 자신의 작품 설명에도 음악 용어를 사용했다. 인물과 사건 전개는 음악에서의 '다성' 개념을 차용한 '소설적 대위법'이라 말하고 '웃음과 망각의 책'은 '변주 형식의 소설'이라고 묘사한다. '정체성', '느림' 등은 51개의 작은 장으로 구성돼 있지만 '웃음과 망각의 책',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 대부분의 작품은 모두 7개장으로 이뤄졌다. 마치 바로크 시대의 춤곡이나 소나타 형식처럼 각기 다른 작품의 각 장은 비슷한 맥락과 템포로 짝을 이루고 있으며 자신의 모든 소설들은 일곱이라는 숫자에 기반한 구조의 변주라 설명한 부분도 흥미롭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마지막 장이나 '삶은 다른 곳에'의 6장은 '느리게'(Lento)로 표기하면 좋겠다고 말한다. 쿤데라의 머릿속은 글자가 아닌 오선지와 음표로 가득한 것 같다.
제일 궁금했던 부분은 야나체크에 대한 그의 사랑이다. 쿤데라는 현대사회에서의 인간 실존의 복잡성, 세상의 소란을 작품에 담기 위해 '생략'을 통해 핵심에 바로 뛰어들어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것은 쿤데라가 어릴 때부터 열렬히 존경해 온 현대음악의 거장이자 음악에서 본질만 남겨 놓고 군더더기를 제거한 혁명적 인물 레오시 야나체크의 방식이기도 하다.
"요즘은 독창적인 아이디어 없이도 작곡의 규칙에 따라 컴퓨터로 음악을 작곡할 수 있어요. 자동적으로 전개하는 소나타를 쓸 수도 있죠. 야나체크는 이런 컴퓨터를 파괴하고자 했습니다. 이행 대신에 거친 병렬을 사용하고, 변주 대신에 반복을 사용하면서 언제나 사물의 핵심으로 직접 뛰어들었죠. 본질적인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음만이 존재할 수 있어요. 저의 목적은 야나체크의 목적과 같습니다. 가장 심각한 질문을 가장 가벼운 형식으로 던지되, 자동화된 소설적 기법과 말 엮어 내기를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야나체크의 음악은 같은 체코 작곡가이지만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의 음악과 전혀 다르다. 두 작곡가의 작품에 후기 낭만주의의 유려한 아름다움이 있다면 야나체크의 음악은 진행이 짧고 간결하고 담백하다 못해 뚝뚝 끊기고 거칠고 투박하다. 심지어 화음은 자주 어긋나고 어둡다. 쿤데라가 자신의 글을 서술하는 방식에서 음악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빌려 온 것과 같은 맥락에서, 야나체크는 말을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애쓰며 음성언어에 과할 정도로 심취했던 사람이다. 여기에 새소리나 바람소리, 물 흐르는 소리 같은 자연이 주는 느낌을 리듬으로 환산해 '영원', '젊음', '자연'을 음악 안에 담아내려 애썼다.
쿤데라와 야나체크의 만남은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1989년 영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프라하의 봄'으로 국내 상영)에서 이뤄졌다. 쿤데라는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영화적 해석에 불만을 표했지만 다니엘 데이 루이스, 쥘리에트 비노슈, 레나 올린의 명연기와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더 이상 완벽할 수 없게 채워진 야나체크의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훌륭한 기록이 되었다. 이반 모라베츠, 스메타나 콰르텟 등이 연주한 OST 앨범에는 야나체크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동화', 현악 사중주 1번과 2번, 바이올린 소나타, 피아노 솔로곡 '인 더 미스트(In the mist)',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에서' 등이 담겨 있다. '체코의 역사와 현실, 언어, 풍광, 복잡미묘한 감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를 직관적으로 말해 주는 명곡 모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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