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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

입력
2023.07.22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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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꺼내 보는 '다시 본다, 고전'이 두 번째 시즌을 엽니다. 한국상담대학원 대학교 교수이기도 한 진은영 시인과 20년 이상 출판 편집 기획자 생활을 거쳐 온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글을 씁니다.


1984년 부커상 후보에 오른 고전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쓴 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77). 위키피디아 커먼스 제공

1984년 부커상 후보에 오른 고전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쓴 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77). 위키피디아 커먼스 제공

'플로베르의 앵무새'(1984)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이런 경향의 작품은 작가의 주관성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고, 메타 픽션 형식으로, 상호텍스트성을 사용하여,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은 어법’으로 쓰여진다. '이다'와 '아니다'가 되풀이된다. 독자들은 조금 혼란스럽겠지만 그 지독한 아이러니들은 모두 현실의 반영이다.

하나씩 짚어보자. 주관성을 숨기지 않기 때문에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헷갈린다. 이 작품이 구텐베르크 에세이상도 수상했다는 사실은 그런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소설이니까 주인공이 있고 그가 화자로 등장하지만 텍스트는 주인공의 에세이 같다. 그는 의사이면서 플로베르를 연구하는 아마추어 연구자이다. 책을 쓰고 싶었지만 여유가 없었다. 이제 아내도 죽였고 자식들도 모두 성장했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자기 주변 이야기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 에세이로 읽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도 소설임을 잊지 않는다면 다 읽은 뒤 소설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메타 픽션은 픽션이 픽션임을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쓰여진다. 그 과정에서 픽션과 실재의 관계, 패러디와 원작의 관계가 잘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는 플로베르의 삶이 주로 그의 출세작인 '마담 보바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추적한다. 결혼한 여자의 간통을 다룬 소설인 '마담 보바리'가 음란하다는 이유로 고발당한 뒤 플로베르는 ‘마담 보바리, 그녀가 바로 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작가와 작품은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공언했을 뿐 아니라 결혼도 하지 않은 남자가 그런 말을 했다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결국 작품은 작가의 일대기임을 인정한 셈이다. 작품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삶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더욱이 아마추어 연구자가 각광받는 문학 연구자로 등장하고 싶다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자료 발굴이 최고의 기회가 될 것이다.

편지 뭉치. 게티이미지뱅크

편지 뭉치. 게티이미지뱅크

플로베르의 경우에는 엄청난 미스터리가 하나 남아 있다. 영국인 여자 가정교사인 줄리엣 허버트에 대한 것이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플로베르가 자기와 꼭 닮은 친구인 부예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한다.

‘자네가 여자 가정교사에게 몸이 후끈 단 것을 보고 난 뒤, 나 역시 그런 기분이 들었네. 식탁에 앉았을 때 내 시선은 저절로 그녀의 드러난 가슴의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움직였네. 그녀는 내 시선을 눈치채고 있었다고 생각하네.’

이것뿐이다. 당연히 플로베르 연구자들에게는 더없이 감질나는 문제였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주인공 앞에 우연히 한 미국인이 등장한다. 자신을 실패한 비평가라고 소개하는 그는 ‘그들이 오랫동안 주고받은 편지 뭉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보여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더없이 흥분했다. 그 편지를 연구하여 당대 최고의 문예지를 통해 혜성처럼 등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인터뷰할 때 할 말도 생각해 놓았다.

주인공은 편지뭉치를 건네받기 위해 만난 자리에서 편지 내용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대답은 분명했지만 그 미국인의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마침내 그 편지를 보여달라고 하자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불태워 없앴다는 것이다! 놀란 주인공이 왜 그랬느냐고 묻자, 플로베르가 마지막 편지에서 모두 불태워 없애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고, 우리의 주인공은 플로베르 연구자이므로 작가의 뜻에 따른 행동을 잘 이해해 주리라 믿었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그 순간 화가 나 어쩔 줄 모른다. ‘범죄자, 사기꾼, 실패자, 살인자인 이 대머리 방화범은 지금 나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가.’ 그런데 그 ‘방화범’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이런 말을 덧붙인다. ‘편지에는 이상한 지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 나의 편지에 어떤 것이 쓰여 있는지, 나의 생활이 어땠는지 물으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거짓말을 하기 바란다. 아니, 누구에게나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대로 그들에게 말해주기 바란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건 작가 스스로가 내린 지독한 자기 부정이 아닌가.

여기까지 읽고는 소설의 첫 페이지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은 플로베르 동상 아래에서, 동상이 얼마나 믿을 만한지 의심하면서 시작한다. 원래 동상은 플로베르 사후 5년이 지난 뒤에 제작된 러시아 조각가의 작품인데, 그것마저 2차 대전 시기에 사라졌다가 다시 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 사후 80년이 지난 뒤에도 식지 않은 독자의 관심을 보여주는 조각인 셈이다. 동상 이야기는 엉뚱하게도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의 작가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에피소드로 마무리된다. 장사꾼 기질이 강한 그의 유모가 40년 전에 자른 것이라며 ‘그런 것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에게 작가의 머리카락을 소파 속을 가득 채울 만큼 팔았다는 것이다.

앵무새. 게티이미지뱅크

앵무새. 게티이미지뱅크

과거에 대한 진실은 이처럼 확인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철저한 조사가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이번에는 '진실이 전시되어 있으리라 기대되는' 박물관으로 가본다. 거기에서 발견한 것 가운데 하나가 플로베르의 마지막 작품, '순박한 마음'에 등장하는 앵무새이다.

플로베르는 작품을 쓰는 동안 박물관에서 빌려와 자신의 책상 위에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앵무새는 시립병원 전시관과 크루아세 기념관에 각각 하나씩 있었다. 그곳 관리자들은 모두 자기네 앵무새가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까지는 소설의 앞 부분에서 드러나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소설이 끝날 때쯤에는 그 앵무새 박제의 출처가 모두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거기에는 앵무새 박제가 50개도 넘게 있었다. 전시관과 기념관에 있던 것은 훗날 거기에서 가져간 수많은 앵무새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더욱이 박제가 그리 오래 보존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과거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뒤였던 것이다.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들은 '자기 부정을 통해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번에는 '그다지 믿을 만하지 않은 어법'과 '상호텍스트성'에 대해 짚어보자. 어법의 문제에 대한 극단적인 예는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잘 드러난다. 이 작품에도 그런 구절이 여러 번 나온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우리는 행복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우리는 불행했다.' 한 마디로 쉽게 규정하기 힘든 상황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쉽게 규정된다면 그것은 그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어떤 것에 대해서든 분명히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앞에서 '과거의 바로 그 앵무새'는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도 비슷한 내용이다. '이다'와 '아니다'가 되풀이되면서 반전에 반전이 이어지는 이유는 언어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게 무엇이든 그것에 대한 적당한 말은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호텍스트성은 앵무새를 통해 상징되고 본문에서도 끝없이 되풀이된다. 앵무새는 유일하게 사람처럼 말할 수 있는 동물이다. 사람 말을 흉내내지만 이전에 배운 말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 자기가 만든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이전에 배운 말을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이 작품에서는 앵무새 어법도 자주 사용된다. 플로베르 특유의 투를 흉내낸다. '우아하고 빈정거리는 듯하면서 다소 외설스러운 데가 있다.' 필요할 때마다 플로베르의 말을 그대로 가져다 쓴다. 예를 들면 '마담 보바리'에 쓰여 있는 다음 구절은 세 번이나 등장한다. '언어란 갈라진 주전자와 같아서 우리가 그것으로 연주를 하면 겨우 곰들이나 장단 맞춰 춤을 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그 언어로 별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를 갈망한다.'

예민한 독자는 조금 거슬렸을 것이다. 앞에서 나는, 이 작품의 주인공에 대해 '이제 아내도 죽였고'라고 썼다. 간통한 아내를 죽인 과정에 대한 고백은 이 소설 뒷부분에 자세히 나온다. 마담 보바리와 간통에 대한 내용에 집착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플로베르의 앵무새·줄리언 반스 지음·신재실 옮김·열린책들 발행·253쪽·1만1,800원

플로베르의 앵무새·줄리언 반스 지음·신재실 옮김·열린책들 발행·253쪽·1만1,800원


강창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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