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놓친 아기들: ①이름도 없이 떠난 영아들]
2019년 2월 김지인(가명)씨는 쌍둥이를 출산한 직후, 출생신고서 대신 손편지를 썼다. 세상에 나온 지 3일 된 쌍둥이 앞으로 보냈다. 쌍둥이의 친엄마로서, 그리고 핏덩이들을 곧 떠나보낼 매정한 엄마로서, 하고 싶었던 말과 해야만 했던 얘기를 꾹꾹 눌러 담았다.
'아이들아. 못난 엄마가 되어 미안해. 더 사랑 받고 행복한 곳에서 좋은 사람이 되길 원해 보낸단다. 사랑해 ○○아, △△아.'
수없이 고민했다. 키울 수 있을까. 얘들 없이 살 수 있을까. 아이들을 버렸을 때 다가올 지옥과, 키웠을 때 펼쳐질 또다른 지옥이 한눈에 나란히 보였다. 그러나 키우기엔 변변한 직업도, 모아둔 돈도 없었다. 가족들과 수년 전 절연했고, 아이들의 생부는 '니가 알아서 하라'며 무덤덤해 했다. 구청·주민센터에 연락했더니 "바쁘니까 일단 찾아와서 얘기하라"는 식이었다. 임신부터 출산까지 누구의 도움도 못 받았다. 그래서 천륜을 어기고 있단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베이비박스를 떠올렸다.
힘들다는 이유로 아이를 바로 버리는 부모는 거의 없다. 남들은 자식 버린 부모라 손가락질 하겠지만,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두고 가는 부모들은, 미래에 다가올 기쁨·희망·보람도 모두 함께 두고 온다. 그리고 대부분 지인씨처럼 이렇게 고뇌하고 아파하고 후회한다. 지인씨는 아이들을 결국 찾아와 5년째 쌍둥이를 힘겹게 키우는 중이지만,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선택을 다시 할 것이라고 장담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제적 부담에 아이 포기 생각"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미등록 영아'가 2,123명에 달한다는 충격적 소식(감사원 조사)에, 정부와 국회가 잇달아 제도 개선안을 내놓았다. 출생통보제(의료기관이 지방자치단체에 의무 통보)는 내년 시행을 앞두고 있고, 영아살해를 엄벌하는 대책(살인죄 적용)도 이어졌다. 임신부가 익명으로 아이를 낳은 뒤 지자체에 인도하는 보호출산제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그러나 천륜을 끊으려고 고민했던 미혼모들, 영아 유기를 매일 마주하는 현장 전문가들은 이런 제도 개선에 더해, 이런 일이 끊이지 않는 근본 원인에 대한 사려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제도는 출산 이후 '미등록'을 방지하는 효과는 있겠지만, 임신과 출산 과정을 남들처럼 버티기 어려운 '취약한 부모'들에게 직접적 도움은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한국일보가 영아 유기·살해에 가장 취약한 계층인 '미혼모'들을 상대로 진행한 심층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취약 부모'들이 임신·출산 과정에서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은 여실히 드러났다. 본보가 한 미혼모 단체의 지원을 받아 미혼모 51명을 대상으로 심층 온라인 설문조사(이달 15~19일)를 진행한 결과, 62.7%(32명)가 "출산 후 아이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한 번이라도 든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 이유로는 경제적 부담이 43.8%(14명)로 가장 컸고, 나홀로 양육에 대한 막막함이 40.6%(13명)로 뒤를 이었다.
경제적 독립이 어렵다는 점은 아이 키우기를 가장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조사 결과 미혼모들이 매월 손에 쥐는 돈은 평균 124만1,000원뿐이었다. 미혼모들이 실제 매달 쓰는 지출액은 수입보다 60만 원 이상 많은 평균 185만2,000원이었다. 매달 60만 원 이상 적자가 나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맡겼다가 다시 찾아왔다는 미혼모 이수인(가명·34)씨는 "분유는 받았는데 분유 탈 젖병을 살 돈이 없어 얼마나 허탈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3개월 된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는 A씨는 (25)는 "아이가 너무 어려 집에서 부업만 가능한데 아무리 검색해도 공고조차 안나 막막하다"고 털어놨다.
임신 때부터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했다는 응답은 76.5%(39명)에 달했다. 임신출산 바우처로 받은 100만 원은 몇 차례의 검사비와 수술로 동이 난다. 필수적인 산부인과 검진일을 건너 뛰는 건 예사다. 입원비가 없어 출산 사흘 만에 아물지 않은 배를 붙잡고 나오는 엄마들도 적잖다.
미혼모 지원 사업, 금액도 정보도 부족
미혼모 넷 중 셋(74.5%·38명)은 현행 미혼모 지원사업의 가장 큰 문제로 '금액 부족'을 꼽았다. 미혼모들 절반이 정부지원금(52.9%)으로 생활을 영위하지만, 충분한 수준은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미혼모들은 △모아둔 돈(35.3%) △고정 수입(31.4%) △가족 지원(27.5%) 등으로 생계를 이어간다고 했다. 그러나 아이의 생부로부터 생활·양육비를 받는다는 엄마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지원 사업에 대한 정보 부족(52.9%·27명)도 문제로 지적됐다. 8살짜리 아이를 키우는 한 미혼모는 "임신하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병원, 지자체인데 무엇을 지원받을 수 있냐 물어도 직원이 잘 모를 때가 많았다"며 "다른 업무로 바쁘다거나 개인별로 지원 사업을 알아봐줄 순 없다는 답을 들은 경우가 대다수"라고 토로했다.
결국 취약 부모들이 임신·출산·초기양육 과정 곳곳에서 맞닥뜨리는 '포기하고픈 순간'에, 적절한 지원책을 배치해 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경제적 고난과 세상의 편견 때문에 궁지에 몰린 취약 부모들이 극단적인 선택(살해·유기)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정부의 △제도 개선과 △지원책 마련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제도가 완비되어도 경제 사정이 어려운 미혼모 등 취약계층이 아이를 포기하는 사례가 쉽게 끊이지 않을 거라는 문제 의식이다.
이들에겐 '아이를 유기하거나 죽이지 말고 낳기만 하면 국가가 책임져 주겠다'는 일관된 메시지를 줄 필요도 있다. 장윤미 한국여성변호사회 공보이사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임에도 키울 수 없는 환경에 내몰린 이유를 이해하는 일도 필요하다"면서 "자신있게 아이를 낳아 양육할 수 있도록 국가가 신뢰를 주는 방향으로 제도가 유기적으로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혜련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홀로 임신한 여성이 고립되지 않고 임신 초기부터 자신과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 국가가 상담을 지원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처벌만 강화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영아 유기 부모 사건을 다수 담당한 김태연 변호사는 "최근 전수조사가 시작되면서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영아 유기 상담을 의뢰하는 전화가 쇄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 변호사는 "국가가 제대로 된 지원도 없이 '아이를 무조건 데리고 있지 않으면 범죄'라고 보는 것 자체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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