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여자어’와 ‘염소웃음’, 젠더화된 분노 앞에서
“무슨 화나는 일 있어요?”
얼마 전 교육에서 들은 말이다.
나에게 한 말은 아니었고, 교육이 시작되기 전 교육 담당자가 강의 개요와 강사 소개를 하며 남긴 말 끝에 한 참여자가 퉁명스럽게 던진 질문 아닌 질문이었다. 교육 담당자가 특별히 어려운 이야기를 무섭게 했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그저 교육 참여자들에게 강의 중 다른 용건으로 전화를 받으러 교육장을 지속해서 떠날 경우 교육 미이수 처리가 될 수 있다고 단호히 이야기하며 앞서 교육에서 발생한 사례들을 안내했을 뿐이었다.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그 ‘화’를 대체 어떤 대목에서 느꼈을까? 웃지 않는 표정? 무뚝뚝한 말투? 그보다 여성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행간에 내가 읽지 못한 무엇이 있었나 알 길 없었지만 앞으로 불려 나온 강사는 캐물을 자신도, 시간도 없어 그저 담당자와 머쓱한 웃음을 나눈 후 굳은 분위기 속에서 강의를 시작해야 했다.
‘강약약강’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인간의 감정이라는 게 다분히 주관적이라서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를 수 있다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감정은 그저 개인적이지만은 않고 유난히 더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 이를테면 분노가 그렇다. 왜 회사에서 직장 상사로 인해 화가 치밀어 올라도 헤드록을 걸거나 딱밤을 때리지 않고 성숙하게 참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은가. 분노를 통제하는 건 서로 다른 의견과 이해관계를 가진 인간이 갈등으로 서로를 죽이지 않고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래서 긴 세월 법과 제도만이 아닌 이른바 ‘사회생활’이라는 문화로 우리의 감정을 다스려왔다.
물론 그것이 매번 성공적으로 통제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분노처럼 강력한 감정은 사람 마음 한구석에 꽤 오래도록 남아 표출될 기회를 엿보다 터져나오곤 한다. 문제는 그렇게 터져나올 때조차 우리는 지극히 익숙한 사회생활의 습관을 못 버리고 될 수 있는 한 분노를 아래로 또 아래로 표출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극히 익숙한 분노의 ‘내리갈굼’을 뼈저리게 느낀 건 역시 군대에서였다. 사실 군인들 사이 내리갈굼이야 이미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임으로부터 욕받이가 되는 건 그닥 놀라운 경험은 아니었다. 그보다 놀라운 건 계급이 드러나 있지 않음에도 너무나 재빠르게 다리 뻗을 곳을 알아보고 골라서 분노를 표출하던 사람들의 민첩함이었다. 나는 이제는 사라진 의무경찰로 군 생활을 했고 개중에서도 주로 음주운전 단속을 맡았기에 술 취하고 분노한 민간인을 마주할 일이 많았다. 뭐 좋은 일로 만난 것도 아니다 보니 웃으며 '하하호호' 할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주취자들의 분노가 줄곧 나를 향했다. 계급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동료들이라고 물리력을 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나 나를 향해 삿대질하던 민원인이 덩치 큰 동료 앞에서는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인간의 간사함과 동물적 감각 앞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경찰 옷을 입은 사람들 앞에서도 법보다 주먹이 빠르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들이라면 일상에서는 얼마나 더 '강약약강(강한 사람한테는 약하게, 약한 사람한테는 강하게 구는 태도를 일컫는 말)'일지 불 보듯 뻔했다.
여성에게 유난히 폭력적인 세상에 대처하기 위한 ‘염소웃음’과 ‘여자어’
분노는 자주 물처럼 아래로 흘렀고 어떤 권력은 군대처럼 시간이 지난다고 쉽게 달라지지 않아서, 권력 아래에서 모진 분노를 감내하던 이들은 각자도생으로 그를 피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이를테면 주변의 많은 여성들은 직장 상사가 던진 불편한 이야기에 분노 대신 짧게 하.하.하. 염소웃음을 지었다. 최대한 상대의 심기를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자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터득한 방법이었고 약자에게 웃음은 때로 거의 유일한 방어 수단이었다.
여자어라는 표현도 있었다. 남성형, 여성형 언어가 따로 있지 않은 우리말에 무슨 ‘여자어’냐 싶겠지만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여자어 해석본’이라 하여 여성들의 말 이면에 담긴 숨은 뜻을 찾는 게시글이 자주 인기를 끌었다. “이거 예쁘지 않아?”라는 말 이면에는 ‘나 저거 사줘’라는 뜻이 숨어있고, “나 살찐 것 같지 않아?”라는 질문에는 빠르게 칭찬을 해줘야 한다며 어쭙잖은 정보를 공유하는 이들은 막상 여성이 아무리 거절을 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튕기는 거라 여기기 일쑤였다. 실로 하루에도 50여 건의 교제폭력이 신고되고, 최소 1.17일에 1명의 여성이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해 있는 현실은 그들이 왜 여자어라 이야기되는 완곡어법을 사용하게 되었는지 알려주지만 대부분의 남성들은 그런 배경에는 무관심했다. 그런 점에서 남성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여자어는 여성들과 소통하기 위한 시도라기보다 여성들이 놓인 환경에 관심 두지 않은 채, 그들이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명료히 하지 못한다며 조롱하기 위한 의도에 가까웠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로든 간다”
강사 양성과정 중에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이라는 프로그램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호신술에도 여성주의가 있나? 싶었던 생각은 교육을 받자마자 사라졌다. 프로그램 초반, 가슴을 펴고 우렁차게 소리를 내지르는 훈련 과정이 있었다. 평소 술집에서 목소리 좀 줄여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을 정도로 튼실한 성대를 가진 사람인지라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단호하게 소리친 경험이 생소하여 소리는 자꾸만 안으로 파고들거나 갈라졌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이가 어릴수록, 몸집이 작을수록, 또 특히나 많은 여성들이 소리 한 번 치지 못하고 움츠러든 경험이 많아 어깨를 펴고 곧추 세운 자세에서 배에 힘주고 소리 내는 법까지 차근히 다시 배우고 연습해야 했다. 그간 수도 없이 ‘여성은 나약해’라는 말을 듣고 목소리 높이면 ‘방정맞다’ 소리 듣던 여성들이 이 교육을 통해 그간 통제되었던 자신의 감정과 신체를 마주해 일깨우고 용기를 얻어 갔다.
미국의 배우이자 극작가였던 메이 웨스트는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로든 갈 수 있지”라는 말을 남겼고 주어진 빈약한 선택지 앞에 선 수많은 여성들에게 이 격언은 길이 됐다. 실로 그간 여성들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착실하게 사회적 요구를 이행하며 살아도 갖은 폭력과 조롱에 시달렸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 드세다고 하거나 유별나다고 낙인을 찍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간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분노를 빼앗아 오기로 했다. 그저 차분히 이야기해서는 도저히 듣지 않아서 광장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더 크게 분노를 말하기로 했다. 2018년 서울지하철 혜화역에서 울려퍼진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는 그런 분노한 여성들의 수많은 목소리가 모인 현장이었다. 누군가는 그 목소리가 ‘폭력적’, ‘극단적’이라 하지만, 막상 그 시위로 인해 죽거나 다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도리어 그 목소리와 함께 이어진 수많은 여성들의 연대를 통해 불법촬영물을 소지하거나 시청만 해도 3년 이하의 징역,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할 수 있게 되면서 불법촬영물 시청 가해로 피해 입었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데 기여했다. 이처럼 어떤 분노는 빈약한 선택지를 늘리고 바꾸어냈다.
왜 이렇게 화가 났냐고?
왜 그렇게 화가 났냐고? 앞서 언급한 교육 현장에 돌아가 할 수만 있다면 도리어 되묻고 싶다. 성폭력예방교육을 이미 충분히 들어서 지겹다고 말하면서도 성폭력 처리 절차는 모르는 관리자가 수두룩하고 담당자가 그렇게 단호히 이야기했어도 여전히 교육 시간에 딴청 피우는 사람투성이인 공간에서, 보이는 건 왜 오직 앞에 선 담당자의 무표정뿐이었을까? 또 자신보다 계급이 높고 나이가 많은 남성이 같은 이야기를 했을 때에도 그렇게 똑같이 질문할 수 있을까? 태도, 말투 같은 비언어적 메시지를 읽어내는 능력은 상대의 권력과 배경 앞에서 왜 그토록 손쉽게 달라지는가.
이제는 세상이 변해서 주변 여성과 이야기 나누는 게 어렵다고, 무슨 이야기만 해도 벌컥 화를 내서 소통할 수가 없다고 하소연하는 남성들이 있다. 만약 소통하려는 의도가 진심이라면, 그저 투덜거리기보다 그들이 왜 분노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여 보면 어떨까. 어쩌면 그것은 부어 있는 것일지 모른다. 한 번 상처 입고 덧나 부어오른 곳은 조금만 스쳐도 “아야!” 하고 소리 지르게 되듯, 사회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통제와 폭력에 상처받은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그런 폭력과 목소리에 무관심하다가 용기 낸 목소리에 이제 와서 왜 소리 지르냐고, 침착하게 이야기하라고 윽박지르는 태도는 얼마나 기만적인가. 당신 곁에도 분명 부어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상처는 저절로 낫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덧나고 곪을 뿐이다. ‘왜’라는 질문은 분노하는 사람이 아닌 분노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 향해야 한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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