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 일면식 없는 피해자에 폭력 표출
분노가 촉발한 전형적 '이상동기' 범죄
사회 뿌리내려, 새 사법체계 마련 시급
24일 오후 찾은 서울지하철 2호선 신림역 일대는 어수선했다. 사흘 전 흉기난동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탓인지 행인도 상인들도 어두운 표정이었다. 사건 장소인 신림역 4번 출구 앞에서 만난 임익선(64)씨는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만 하면 몸서리가 처진다”고 했다. 두려움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묻지마 범죄’에 왜 아무런 대책이 없느냐”는 정부를 향한 힐난이었다.
21일 이곳에서 한 명을 죽이고, 3명을 다치게 한 흉기난동 피의자 조모(33)씨는 피해자들과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전형적인 ‘이상동기’, 이른바 묻지마 범죄였다. 그가 폭력 등 전과 3범이었고, 십수년 전에 비슷한 장소에서 유사 범죄로 처벌받은 전력도 밝혀졌다. 분명 관리가 필요한 대상이었지만 당국은 방치했다. 대검찰청 통계를 보면, 이런 유형의 범죄는 2012~2016년 4년간 270건이나 됐다. 더 이상 책임을 개인의 일탈로 치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분노사회, 처지 비관 '묻지마 범죄' 양산"
범죄는 대개 원한, 금전 등 동기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범행 목적이 불분명한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당장 올해 5월 부산에서 정유정(23)이 과외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만난 또래 여성을 잔혹하게 살해ㆍ유기한 사건이 있었다. 지난해 2월엔 전남 광양의 한 편의점에서 직원에게 이유 없이 흉기를 휘두르다 붙잡혔다.
조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경찰에 “(신림역이) 사람이 많은 곳이란 걸 알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2010년엔 신림동 한 주점에서 시비가 붙은 손님들에게 소주병을 휘둘러 집행유예 선고를 받기도 했다.
이상동기 범죄는 크게 ‘정신질환형’, ‘현실불만형’, ‘만성분노형’ 3가지로 나뉜다. 범죄전문가들은 조씨의 범행 양태를 현실불만과 만성분노가 결합된 유형으로 보고 있다. 윤정숙 한국형사ㆍ법무정책연구원 범죄분석조사연구실장은 “전과 이력을 봐도 처지를 비관해 쌓인 분노를 표출하려 했던 것 같다”며 “피해자가 모두 남성이라는 점에서 또래 남성들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면모도 엿보인다”고 분석했다.
학계에서는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과 양극화 탓에 ‘분노’를 매개로 한 범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한국은 이제 규범과 제도의 설 자리가 좁아지면서 누구나 불만이 커진 ‘분노사회’가 됐다”며 “묻지마 범죄는 이를 해결할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타인을 희생양 삼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회적 테러’”라고 짚었다.
이상동기 범죄 만연... 추세 파악 시급
문제는 대책이다. 이상동기가 원인이 된 범죄가 뿌리내린 정황이 뚜렷한데도, 수사당국은 아직 개념조차 정립하지 못했다. 경찰청은 지난해 1월 ‘이상동기 범죄’를 묻지마 범죄를 일컫는 공식 용어로 정하고 체계적 사례 분석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1년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도출된 자료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 관계자는 “이상동기를 정의하는 작업부터 쉽지 않아 유관부처 및 전문가들과 계속 논의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가뜩이나 이런 유형의 범죄는 피해 규모를 예단할 수 없어 새로운 수사ㆍ사법시스템 마련이 더욱 시급하다. 가령 범죄자 전과 비중이 88.3%에 달하고, 3명 중 1명은 ‘재범 고위험군’에 속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는데, 이를 근거로 ‘맞춤형’ 예방대책을 짜야 한다는 것이다. 윤 실장은 “최소한 대략적인 이상동기 범죄 추세라도 파악하려는 노력이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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