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17년차 베테랑 검사이자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저자인 정명원 검사가 전하는 다양한 사람과 사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야기.
날씨 뉴스 유용성의 빈부격차
폭우에 힘들었던 많은 서민들
어려운 이웃 돌보는 용기 필요
농사를 짓는 아버지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는 '날씨'였다. 지금처럼 실시간으로 날씨정보가 제공되지 않던 시절, 9시 뉴스 끝머리에 나오는 날씨예보가 아버지가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정보였다. 날씨 뉴스는 항상 메인 뉴스가 모두 끝난 후에야 나왔으므로 아버지는 고된 농사일로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며 힘겹게 날씨예보를 기다려야 했다. 누군가에게만 중요할 정치나 경제 이야기에 비해 날씨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범보편적인 정보일 텐데, 어째서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뉴스들을 다 하고서야 날씨 이야기를 전해 주는지 어린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나서 날씨란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도, 평등하게 작용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리치는 빗물이, 들이치는 바람이 누군가에게는 한 해 농사를 결정짓기도 삶과 죽음을 가르기도 하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또 어느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그저 공기의 온도나 습도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힘 있고 높고 비싼 영역에 가까이 사는 사람일수록 날씨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사실과 그 반대쪽의 영역에는 같은 비가 내려도 더 깊이 젖고, 더 먼저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 어른이 되었다. 결국 일기예보를 자주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이쪽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뉴스가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날이 있다. 재난이나 재해라고 불리는 상황이다. 날씨가 비로소 범보편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여러 날 동안 날씨가 매번 첫 번째 꼭지를 차지하는 뉴스들을 보아야 했다. 거칠게 넘실거리는 황토색의 물결과 물에 잠긴 자동차들, 거대한 바윗돌과 토사로 뒤덮인 누군가의 집이 있었던 자리들이 메인 뉴스의 화면을 가득 채웠다. 뉴스 화면에 잡힌 재난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재난은 쏟아져 내렸다. 표정이 없는 재난에는 죄책감도 동정심도 있을 리 없다. 버스를 타고 아침 출근을 하던 직장인, 산 아래 마을에서 오래전부터 농사를 일구고 소를 키우던 노부부, 폭우가 눈앞을 가리는데도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 이른 출근을 서두르던 요양보호사의 삶을 덮쳤다. 폭우는 이쪽저쪽을 가리지 않았으나 이번에도 언제나처럼 더 깊이 젖고 더 늦게 마르는 쪽의 사람들이 먼저 쓰러졌다.
처음에는 무도한 황토색 물살만을 비추던 화면이 점점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는 쪽으로 바뀐다. 체육관에 모로 누워 굽은 다리를 두드리는 할머니, 흙탕물에 덮인 농지를 망연히 바라보는 농부,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려 나와보니 이미 이웃집이 형체도 없이 사라졌더라고 말하는 마을 사람의 젖은 눈을 본다. 온종일 비에 젖으며 실종자를 찾기 위해 흙더미를 뒤지는 수색대원의 얼굴을 본다. 물이 차오르는 지하차도에서 낯모르는 사람의 손을 끝내 놓지 않았던 이의 살갗이 벗겨진 손바닥을 본다. 그걸 보고 있는 사람들도 어느새 비슷한 표정이 된다.
지하차도에서 가드레일을 타고 겨우 탈출할 수 있었던 생존자는 남겨진 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게 미안하다고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그런데 정작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지만 하지 않은 사람들은 표정이 없다.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은 재난을 닮았다.
결국 세상을 나아지게 할 수 있는 쪽은 표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쪽이다. 먼저 젖고 깊이 젖지만 이웃이 젖으면 같이 젖을 줄 아는 사람들이 단호히 말해 줄 차례다. 마땅히 있어야 할 책임이 어떻게 제자리를 찾아가는지, 무너진 제방이 어떻게 다시 쌓이는지, 성난 표정으로 끝내 지켜보아야 한다. 그것이 언제고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는 무표정한 재난을 대하는 우리 사람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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