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한국과 중국, 양국 대사 맞교환은 불가피하다.”
얼마 전 열린 중국의 한 싱크탱크가 관여한 1.5트랙(민간+정부) 협의체에서 나온 얘기입니다. 양국 간 현안이 논의되던 과정에서 이 같은 발언이 주목을 받았는데요. 당시 참석자들이 이에 동의했는지, 아니면 반박했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양국 대사를 둘러싼 외교장벽이 너무 높다”는 진단에 큰 이견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중관계가 좀체 물꼬를 트지 못하는 상황에서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와 정재호 주중한국대사 모두에게 운신의 폭이 그리 넓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양국관계 발전을 위해 인적 쇄신을 통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싱하이밍이 지핀 불... 얼굴 붉히는 한중관계
싱 대사는 최근 '베팅' 발언으로 공분을 자아낸 인사입니다. 지난달 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접견한 자리에서 “중국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앞으로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는데요. 사상초유의 사태에 “오만한 중국 대사가 한국을 겁박했다”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이로 인해 한중관계는 한층 더 껄끄러워졌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까지 나섰죠. 조선시대 말기 전횡을 일삼았던 위안스카이까지 소환하며 “싱 대사의 부적절한 처신에 우리 국민이 불쾌해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에 대통령실은 ‘적절한 조치’를 중국 측에 요구했다고 밝혔습니다.
외교부도 가만 있지 않았습니다. 장호진 1차관이 싱 대사를 초치(소환)해 엄중히 경고했습니다. '특별한 조치'도 거론했습니다. 외교부는 공식적으로 “싱 대사를 구체적으로 지칭한 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지만, 사실상 싱 대사 교체를 요구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한국 반발 여론에도 중국은 무덤덤...이유는?
하지만 한국의 맹렬한 여론에 아랑곳없이 중국의 반응은 미지근합니다. 발언 이후 두 달이 다 되도록 중국 정부는 조용합니다. 잠시 ‘자숙’하는 듯했던 싱 대사는 이전과 다름없이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중한 양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웃”, “친구로서 이웃으로서 잘 지내자 하는 그런 마음”이라면서 립서비스에 여념이 없습니다. 심지어 26일에는 제주를 찾아 오영훈 지사와 만난 자리에서 '중국인 단체관광 재개' 요청에 "제주의 요청이 잘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중국 정부에 전달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당분간 싱 대사 문책이나 교체 가능성은 없는 셈입니다.
국내 중국 전문가들은 여러 해석을 내놓습니다. “중국에서는 애초부터 싱 대사 발언을 잘못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평가하는가 하면, “후임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지한파로 꼽히는 싱 대사를 교체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이에 더해 한 외교부 당직자는 “싱 대사는 그나마 ‘양호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싱 대사가 이번 발언으로 매우 무례한 외교관으로 비판을 받고 있지만, 한국에 나와 있거나 한국에서 근무했던 중국 측 인사들과 비교하면 나은 편"이라는 것입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국면에서 잇단 강경 발언으로 국민정서를 자극한 전임 추궈훙 대사는 물론이고, 싱 대사에 이어 차기 대사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천하이 미얀마 대사, 또 다른 후보인 장청강 광주 주재 중국 총영사 등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카드라는 건데요. 특히 주한중국대사관 부대사(공사참사관)를 지냈던 천하이 대사의 경우 한국 기업 관계자들을 상대로 “소국이 대국에 대항하면 안 된다”거나 “사드 배치 땐 단교에 버금가는 조치를 각오해야 한다”고 협박에 가까운 거친 언사를 늘어놓기도 했으니까요.
이렇듯 전망과 분석의 결은 조금씩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중국 정부가 한국 내 여론에 떠밀려 싱 대사를 교체할 가능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과거 문재인 전 대통령 비하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가 정기인사 형식으로 본국에 돌아간 소마 히로히사 전 주한일본대사관 총괄공사의 전례와 비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일정 기간 냉각기를 거치면서 싱 대사 임기를 채워준 뒤 자연스럽게 이임하는 모양새를 취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통상 대사의 임기는 3년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싱 대사는 이미 부임한 지 3년 6개월이 지났습니다. 싱 대사는 1964년생으로 정년이 내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중국 지도부가 그럴듯한 모양새로 퇴임하는 길을 열어줄 공산이 큽니다. 올 연말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주한중국대사가 바뀌는 시나리오입니다.
싱 대사와 정재호 주중대사 동시 교체?
중국의 사정이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생깁니다. 중국 싱크탱크는 왜 정재호 주중한국대사의 이름을 함께 거론했을까요. 중국 외교부가 지난달 정 대사를 불러들이기도 했지만, 이는 한국 외교부의 싱 대사 초치에 대한 맞불 성격이었습니다. 정 대사가 중국 정부 눈 밖에 났다거나, 눈에 띄는 잘못을 했다는 얘기도 딱히 들리지 않습니다. "잘못은 싱 대사가 했는데, 왜 정 대사를 걸고 넘어지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대사를 함께 바꿔 자신들의 체면을 세우려는 중국의 '물귀신' 작전으로 볼 만한 대목입니다. 이와 관련 문홍호 중국문제연구소장은 "한중관계의 전망이 현재로서는 그리 밝지 않다"고 진단합니다. △윤 대통령의 대만해협 관련 발언 △싱 대사의 한국 직격 △사드를 둘러싼 해묵은 갈등까지 한중 간에는 곳곳이 지뢰밭입니다. 특히 7월 27일 정전협정체결일(북한의 전승절)을 거치면서 북중관계 밀착이 강화된 점은 우리 대중외교에 큰 부담입니다.
다만 문 소장은 미중관계에 비유하며 "아무리 좋아져도 천장을 뚫고 갈 수는 없고, 아무리 나빠져도 바닥을 뚫고 내려갈 수는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어느 순간 한중관계를 관리하고 방향을 틀 '묘수'가 필요할 것이고, 양국은 현재 그 수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정 대사가 서울대 교수 직을 유지하고 있는 점에 비춰 윤석열 정부에서 주중대사 자리를 마냥 지킬 수는 없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옵니다. 한중 대사 교체는 양국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대사의 거취가 자꾸 거론되는 건 바람직한 상황은 아닙니다. 특히 정부는 올해 안에 한중일 정상회의를 개최하려 공을 들이고 있는데 중간다리 역할을 할 대사를 바꾸는 건 외교적으로도 손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하염없이 추락했던 한중관계가 바닥을 찍고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서는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으려는' 노력 또한 필요합니다. 중국 싱크탱크가 제기한 '한중 양국 대사 동시 교체'가 한낱 아이디어 차원인지, 아니면 다양한 복선이 깔린 외교행위의 전조인지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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