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88년생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와 93년생 곽민해 뉴웨이즈 매니저가 2030의 시선으로 한국정치, 한국사회를 이야기합니다.
역대 우리나라 장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이주영 전 해양수산부 장관을 꼽을 것이다. 세월호가 전남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2014년 4월 16일, 그는 취임한 지 겨우 한 달 된 장관이었다. 업무 파악도 다 안 됐을 그에게 관리 감독 소홀이나 선박 규제 완화 등에 책임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팽목항을 찾은 그에게 유족의 원성과 비난이 쏟아졌다. 정부 사람이고, 주무 부처 장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장관은 연신 죄송하다며 사과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후 스토리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는 참사 이후 136일간 팽목항을 지켰다. 처음엔 경황이 없어서, 나중엔 유족에게 미안해서 자르지 못했다던 긴 머리와 지저분한 수염은 그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쇼라고 해도 좋았다. 실권자가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 상주하는 것만으로도 실무자들의 업무는 한층 더 수월해진다. 그 자체로 피해자들에겐 힘이자 위로다. 유족들은 이 장관에게 신뢰를 보냈고, 그는 사건을 어느 정도 수습한 뒤 그해 연말에 물러났다. 예나 지금이나 그에게 ‘세월호 책임론’을 묻는 이는 없다.
2005년 8월 말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동부를 강타했다. 제방이 무너졌고 재즈의 고향 뉴올리언스는 시의 80%가 물에 잠겼다. 1,000명 이상이 사망한 그 참사에서 사진 한 장이 여론을 들끓게 했다. 전용기에 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수해 입은 루이지애나주 일대를 상공에서 ‘시찰’ 중인 사진이었다. 참혹한 재난과 너무도 동떨어진 그 안락한 풍경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그 사진 속에서 2001년 9‧11테러 당시 무너진 건물 위에서 확성기를 들고 구조대원들을 독려한 부시는 더 이상 없었다. 부시는 이때 잃은 국민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9명 만장일치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기각함에 따라 이 장관은 스스로 책임론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헌법재판소는 사전 예방 조치와 사후 대응, 품위유지 등 세 가지 쟁점에서 그에 대한 탄핵 사유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이태원 참사는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발생한 재난이지 한 사람에게 온전히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장관은 법에서 이겼다. 그러나 정치에서는 졌다. 이태원 참사 발생 직후 주무 부처 장관으로서 책임지고 사의를 표명했더라면 그 자체로 정치적 면죄부는 되었을 것이다. 야당의 비판이 ‘정치 공세’라는 주장이 통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는 “사후 전지적 관점에서 책임을 추궁하는 건 부당하다”라며 회피했고,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기각 결정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은 장관이 되었다. 앞으로 어떤 사고가 나든 그에게는 각종 책임론이 따라붙을 것이다.
법률가 출신 정치인들은 세상을 법적 잣대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에서 법은 일부다. 사람들의 감정, 도덕, 윤리 등이 뒤섞여 정치적 현상을 이룬다. 이태원 참사 이후 이 장관을 보면 이 당연한 사실을 간과한 것처럼 보인다. 누구도 그에게 법적 책임을 지고 159명이 희생되게 한 죄로 감옥에 가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최소한의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지길 바랐을 뿐이다. 이 장관은 그 책임을 외면함으로써 유족의 마음과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고생 많았다”며 그를 격려한 대통령의 신임은 이것들에 비하면 아주 작은 보상에 불과하다.
헌재의 탄핵 기각 직후 이 장관은 보란 듯이 충남의 수해 현장으로 향했다. 이태원 참사를 제대로 매듭짓지 않고 이루어지는 그의 행보는 모래 위에 쌓은 성이 될 가능성이 크다. 비단 이 장관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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