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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가 판치는 세상을 향한 철학자의 일침

입력
2023.08.07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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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프랭크퍼트(1929.5.29~2023.7.16)

해리 프랭크퍼트는 인과론-결정론적 세계에서도 인간은 자유의지의 주체로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양립주의적 입장을 견지한 미국의 도덕-행동철학자로서, 사고실험인 '프랭크퍼트 사례' 등을 통해 자유의지 논쟁의 한 축을 지탱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2005년 출간한 '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란 책으로 절정에 올랐다. 그는 '개소리'의 개념적 의미를 현실적-철학적으로 분석하며, 거짓말보다 훨씬 교활한 개소리의 사회적 해악을 단단한 논리로 명쾌하게 까발렸다.creativecommons.org

해리 프랭크퍼트는 인과론-결정론적 세계에서도 인간은 자유의지의 주체로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양립주의적 입장을 견지한 미국의 도덕-행동철학자로서, 사고실험인 '프랭크퍼트 사례' 등을 통해 자유의지 논쟁의 한 축을 지탱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2005년 출간한 '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란 책으로 절정에 올랐다. 그는 '개소리'의 개념적 의미를 현실적-철학적으로 분석하며, 거짓말보다 훨씬 교활한 개소리의 사회적 해악을 단단한 논리로 명쾌하게 까발렸다.creativecommons.org

‘Bullshit’은 'f-word’나 ‘a-word’처럼 주로 욕설에 쓰이는 금기어다. 사전들은 ‘헛소리’쯤의 뜻으로 순하게 풀이하지만, 거기엔 10년 우정도 부술 수 있는 모욕의 뉘앙스가 담겨 있다. 영미권 신문들은 부득이 쓸 경우 관행적으로 ‘bull----‘처럼 가려서 표기한다.

2005년 1월 미국 스탠퍼드대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Harry Frankfurt)의 책 ‘On Bullshit’이 스탠퍼드대 출판부에서 나왔다. 협잡(humbug)이나 헛소리(buncombe), 허튼소리(nonsense),사기(imposture), 허풍(brag), 거짓말(lie) 등 유사한 의미로 쓰이는 여러 낱말들과 달리 ‘bullshit’이 지닌 차별적 의미와 사회적 기능(해악) 등을 사전과 용례 등을 통해 도덕철학 심리철학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책은 도발적인 제목 못지않게 만듦새로도 눈길을 끌었다. 손바닥 크기 문고본(A6판)에 행간까지 듬성듬성 편집된, 마음먹고 덤비면 30분이면 다 읽을 만한 67쪽 분량의 9.95달러짜리 책. 하지만 그 책은, 가히 ‘bullshit 신드롬’이라 불릴 만큼 불티나게 팔리며 1년여 만에 미국서만 수십만 권이 팔렸고, 전세계 23개 언어로 번역됐다. 70대 중반 노철학자도 평생 처음 신문 방송 인터뷰와 유명 토크쇼 등에 잇달아 초대됐다. 한국어판 제목은 ‘개소리에 대하여’(이윤 옮김, 2006, 필로소픽)였다.

책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 문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소리가 너무도 만연하다는 사실이다. 모든 이가 이것을 알고 있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개소리를 하고 다니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개소리를 알아차리고 거기에 현혹되지 않을 정도의 능력은 갖추고 있다고 꽤 자만하고 있다. 그래서 개소리와 관련된 현상은 진지한 검토의 대상으로 부각되지 않았고, 지속적인 탐구의 주제가 되지도 않았다.”

저자는 ‘거짓말(쟁이)’과 ‘개소리(쟁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사실(진실)과의 관계로 설명한다. “거짓말(…)을 지어내기 위해서 거짓말쟁이는 무엇이 진실인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효과적인 거짓말을 지어내려면 거짓말쟁이는 자신의 허위를 그 진리의 위장 가면 아래에 설계해야 한다.” 반면에 개소리쟁이는 진실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의도(목적)만 중요하다. 즉 의도에만 부합하면 무슨 말이든,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개소리를 통해 그는 “의견(이나 여론)을 유도하고 태도와 감정을 조작”한다. 요컨대 개소리의 본질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가짜(phony)라는 데 있다.(위 책)

거짓말에는 정밀한 사기나 정교한 위조(복제)품이 그렇듯 상당한 노력이 요구된다. 먼저 ‘사실’을 숙지해야 하고,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 부과하는 객관적인 제약”에도 따라야 하며 “일정 정도의 숙련도”도 필요하다. 반면에 개소리에는 간섭이 덜하다. 덜 정교해도 되고 덜 분석적이어도 된다. “개소리쟁이의 작업은 보다 광범위하고 독립적이며 임기응변과 꾸밈, 그리고 창의적인 연기의 여지가 많다. 이것은 공들인 노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예술의 문제다.”

그리고 대중은 거짓말쟁이보다 개소리쟁이에게 상대적으로 너그럽다. “거짓말은 종종 모욕감이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반면 개소리에 대해서는 불쾌하거나 거슬린다는 표시로 어깨를 으쓱하면서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위 책)

'On Bullshit'의 한국어판 '개소리에 대하여'. 역자는 원제에 담긴 비속어 느낌을 살리기 위해 '개소리'로 번역했다고 '옮긴이의 글'에 적었다.

'On Bullshit'의 한국어판 '개소리에 대하여'. 역자는 원제에 담긴 비속어 느낌을 살리기 위해 '개소리'로 번역했다고 '옮긴이의 글'에 적었다.

즉 거짓말은 역설적으로 사실의 권위를 전제하는 반면 개소리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하찮게 취급한다. 거짓말이 만연한 세상에선 사실(진실)에 대한 갈망도 커지지만, 개소리가 판을 치면, 그래서 솔깃한 말에만 귀를 기울이고 ‘아니면 말고’ 식의 정서가 팽배하면 사실이 설 자리를 점차 잃는다. 책의 결론, 프랭크퍼트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개소리는 진실에 대한 존중을 훼손하고 관심을 약화시킴으로써 (거짓말보다 더 심각하게) 교활하게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프랭크퍼트가 저 글을 쓴 시점-맥락과 프린스턴대출판부가 단행본으로 출간한 동기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다.

프랭크퍼트는 예일대 교수로 재직하던 1986년 1월, 럿거스대 문학-철학저널 ‘Raritan’에 저 글을 발표했다. 당시는 포스트구조주의-포스트모더니즘이 철학계를 비롯한 학계와 문화계 전반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때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론적-회의론적 세계관, 즉 인간은 각자의 관점에 갇힌 신뢰하기 힘든 주체(관점주의, perspectivism)이며 그들이 인식하는 ‘진리’란 결코 ‘확정적’일 수 없다는 회의와 부정이, 시대와 화두이자 세련된 지성(인)의 패션처럼 유행했다.

프랭크퍼트는 그런 입장과 주장들을 못마땅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포스트주의의 반대편 극단이라 할 만한 이성과 합리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철학)를 전공한 철학자였다.
데카르트는 육체와 정신(물질과 관념)의 이원론적 세계관 위에 독립적-이성적 주체가 끊임없는 방법론적 회의(연역)를 통해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최종 단계의 확정적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철학적으로 정초함으로써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철학자다. 주체와 진리(진실)를 부정하는 ‘상대주의적 독재(dictatorship of relativism)’의 몰지성적 폐해(가능성)를 프랭크퍼트는 경계하고자 했다. 더욱이 그의 직장이던 예일대는 자크 데리다, 폴 드만(Paul de Man)등이 포진한, 그의 표현을 빌자면 “개소리(쟁이) 세계의 수도”였다.

철학계의 유서 깊은 논쟁거리 중 ‘자유의지(free will)’ 논쟁이란 게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인과론적 결정론(determinism)과 자유의지와 결정론적 세계가 양립할 수 있다는 양립주의(compatiblism) 간의 논쟁. 전자는, 우주의 모든 사건은 우리가 다만 모를 뿐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인과론적-과학적 법칙에 의해 합리적으로 움직이며, 인간의 자유의지란 허구이거나 착각일 뿐이라 판단한다. 결정론자들은 ‘대안적 가능성의 원칙(principle of alternate possibilities)’, 즉 어떤 행위자에게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없다면 그 행위자는 자기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명제를 진영 논리의 기둥으로 삼는다.

프랭크퍼트는 대표적인 양립주의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록펠러대 재직 시절인 69년 ‘대안적 가능성과 도덕적 책임’이란 논문에서, 대안이 통제된 결정론적 세계(관)에서도 자유의지는 존재할 수 있고, 당연히 도덕적 책임도 물을 수 있다는 점을, '프랭크퍼트 사례(또는 반례)'라 불리는 사고실험으로 논증했다. 한국의 대입 논술세대에게는 비교적 익숙할지 모르는 ‘프랭크퍼트 사례’의 예를 들자.

A가 B에게 누군가를 살해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A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 B의 뇌에 몰래 컴퓨터 칩을 이식했다. 즉 B가 명령에 불응할 경우 칩이 활성화돼 그 프로그램에 따라 명령을 이행하도록 한 것. B에게는 명령을 이행하는 것 말고는 대안적 가능성이 없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B는 칩과 무관하게 자발적으로 A의 명령을 수행할 수도 있다. 그 경우에도 B는 ‘대안적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프랭크퍼트는 2년 뒤인 71년 논문 '의지의 자유와 인격의 개념'에서 , 결정론 진영이 전가의 보도처럼 여겨온 또 다른 명제 즉 “사람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할 수는 있지만, 원하는 바 자체를 원할 수는 없다”라는 금언을, 저 유명한 흡연자 사고실험을 통해 논박했다. 예컨대 흡연자 A는 당장은 담배를 간절히 원하지만, 언젠가 금연하고 싶다는 바람도 동시에 품고 있다. A는 흡연이라는 1차 욕구(욕망)의 주체인 동시에 1차 욕구를 스스로 거부하고자 하는 2차 욕구(금연)의 주체다. 그는 지금 담배를 피울 수도 있고, 곧장 끊을 수도 있다.
프랭크퍼트는 ‘자유의지’의 자유를 다양한 욕망 사이의 내적 관계로 파악했고, A가 1차욕구와 2차욕구를 일치시켜 실천한다면 자유의지의 주체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랭크퍼트는 2차욕구, 2차적 의지(second-order volition)야말로 오직 인간만이 지니는 인간 조건이며 개인의 인격과 개성을 규정짓는 특징이라고 판단했다. (2차욕구가 없는 인간을 그는 ‘덜된 인간(wantons)’이라고 구분했다.) 그는 2차욕구의 개념을 '관심(care about st)'과 '사랑'으로 확장해갔다.
그런 그에게 포스트주의자들의 주장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의 ‘코기토적 주체’ 뿐 아니라 의지-자유의지- 2차욕구-관심-사랑의 주체를 근거 없는 사변으로 폄하하는, 그럴싸하게 치장된 ‘개소리’일 뿐이었다.

찬란한 역사나 신의 가호, 정의, 복지, 화합 등을 앞세운 정치인들의 추상적-포괄적 수사는, 프랭크퍼트의 분석에 따르면, 대부분 '개소리'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말의 진위나 실현 가능성이 아니라 말을 통해 치장될 자신의 이미지이고, 그로써 얻게 될 대중의 환심과 지지다.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언론 보도도 '거짓 뉴스'와 차별화돼야 할 '개소리'일 것이다. 게티이미지.

찬란한 역사나 신의 가호, 정의, 복지, 화합 등을 앞세운 정치인들의 추상적-포괄적 수사는, 프랭크퍼트의 분석에 따르면, 대부분 '개소리'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말의 진위나 실현 가능성이 아니라 말을 통해 치장될 자신의 이미지이고, 그로써 얻게 될 대중의 환심과 지지다.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언론 보도도 '거짓 뉴스'와 차별화돼야 할 '개소리'일 것이다. 게티이미지.

한편, 대학출판부가 그의 잊힌 논문을 발굴해 단행본으로 출간한 2005년은 2001년 9.11테러에 이은 맹목의 ‘애국-안보’ 논리와 ‘테러와의 전쟁’으로, 즉 안으론 시민 감시와 사찰을 통한 인권과 자유의 억압이 바깥에선 탈레반과의 전쟁과 '대량살상무기'라는 뿌연 정보를 근거로 한 이라크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때였다. 부시 행정부는 의회 협의 과정에서 의심(의혹)과 직감, 종교적 신념 등을 정책 판단의 근거로 제시하곤 했다.
2004년 3월 조 바이든 당시 상원의원은 대통령 오찬 모임에서 부시에게 “모든 사실이 불분명한데 어떻게 (정부 판단이 옳다고) 확신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당시 부시의 대답이 “내 직감(My Instincts)”이었다. 부시는 이라크전을 앞두고도 여러 차례 "신의 계시" "신이 부여한 사명"이란 말을 반복했다.
백악관 한 보좌관의 소위 '현실 기반 커뮤니티(reality based community)'에 대한 조롱이 불거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저널리스트 론 서스킨트(Ron Suskind)가 폭로한 바 한 백악관 보좌관은 “현실에 대한 분별력 있는 탐구를 통해 현명한 해법을 도출할 수 있다고 믿는” 현실 기반 커뮤니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실제 세상은 더이상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제국이며, 우리는 행동을 통해 현실을 창조한다. 당신들이 그 현실을 신중하게 연구하는 동안 우리는 새로운 행동으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는 역사의 주역(actors)이며 당신네들은 늘 우리의 행동에 대해 뒤늦게 연구만 하는 존재로 남게 될 것이다.”

대학출판부가 프랭크퍼트의 해묵은 논문을 단행본으로 내게 된 취지를 명시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 하지만 상당수 프랭크퍼트의 독자들은, 또 언론들은, 그의 책과 당대의 현실을 겹쳐보며 현실의 ‘개소리’들과 그 해악을 새삼 인식했다.

해리 고든 프랭크퍼트는 미혼모의 아들로 펜실베이니아 랭혼(Langhorne)에서 태어나, 중산층 유대인 부부에게 곧장 입양됐다. 양아버지는 고객의 주식 주문을 전신으로 중개하던 주식전산화 이전 증권거래소 전신원이었고, 양어머니는 템플대에서 음악을 전공한 피아노 교사였다. 입양 직후 대공황이 터지면서 양아버지는 약 8년간 실직자로 지내야 했고, 프랭크퍼트가 기억하는 바, 그를 입양한 것을 여러 차례 후회했다고 한다. 양어머니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피아니스트의 꿈을 프랭크퍼트를 통해 이루고자 했다. 양아들에게 4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가르쳤고 어려운 살림에도 볼티모어 피바디 음악원에 보내기도 했다. 히브리어 언어학자의 딸인 양어머니가 아들에게 투사한 또 다른 꿈은 랍비였다. 프랭크퍼트는 만 6세에 히브리어 학교에 진학한 이래 중등시절 내내 유대계 공립학교에서 히브리어 문법과 어휘, 구약 성경과 역사를 공부해야 했다.

2017년 미국 학술단체협의회(ACLS)의 ‘찰스 호머 해스킨스 상’ 수상 강연에서 프랭크퍼트는 “종교적 진리”에 대한 “교훈적”이고, “지루하고 믿을 수 없는” 수업에 환멸을 느끼며 “해석에 대한 의심”과 “회의의 필요성”을 절감하곤 했다고 말했다.
철학에 대해 아는 거라곤 버틀란트 러셀의 에세이 독서 경험이 전부였다는 그는 랍비와 철학자가 비슷한 거라는 논리로 양모를 설득, 존스홉킨스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학사(1949)- 박사(1954)학위를 받고 오하이오 주립대(56~62)와 뉴욕주립대(62~63), 록펠러대(63~76), 예일대(76~90), 프린스턴대 교수(90~2002)로, 또 명예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한 차례 결혼-이혼으로 딸 둘을 두었고, 80년대 말 재혼한 아내와 말년까지 해로했다.

평소 대체로 과묵했고 일상적인 농담도 썩 즐기지 않았다는 그는, 책 ‘개소리에 대하여’의 형식처럼, 단단하고 함축적인 농담 같은 진담을 더러 구사하곤 했다.
대학원시절 데카르트를 전공하게 이유로 그는 데카르트의 진리에 대한 흔들림 없는 추구와 명료한 문장들이 마음에 들었고 ”그의 주요 저작들이 고무적으로 짧았기 때문(encouragingly short)”이었다고 말했다. ‘개소리에 대하여’에 이어 2006년 사실-진실-진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줄어드는 현실을 다룬 책 ’진실에 대하여(On Truth)’를 출간했다.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전작이 어쩌다가 베스트셀러(accidental best seller)가 됐다”고 말하자 그는 “무슨 뜻이냐? 사람들이 실수로(by accidental) 샀다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책(101쪽)을 짧게 쓴 이유로는 “짧은 책에도 많은 개소리가 담길 수 있지만 긴 책에는 거의 필연적으로 개소리가 포함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학계보다 정치계에 훨씬 개소리가 많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나도 그러기를 바란다”면서 “(하지만) 중요한 사상도 없으면서 있는 척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주절주절 늘어놓아 사실을 모호하게 만드는 자들이 얼마간 있다”고 말했다.
2017년 강연에서 그는 철학자로서 자신을 지탱한 ‘델포이의 신탁’은 줄곧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는 것이었고, 연구의 기본적인 지향도 ‘나 자신에 대한 배움과 앎’이었다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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