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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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20대 직장인입니다. 아직 어떤 분야가 저에게 맞을지 탐색 중입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부모님을 경제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에 마음이 괴롭습니다. 다른 일을 찾아 일을 그만두고 싶어도 부모님을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그러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지금은 계약직으로 여러 직무를 경험해 보며 어떤 분야가 저에게 적합할지 찾는 과정입니다. 적성을 찾아 안정적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현재 목표예요. 정규직 일자리를 얻어 지금보다 안정적 수입이 생기면 그동안 제가 하고 싶었던 그림 그리기나 여행 등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갈등을 겪으며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었는데, 경제적인 이유로 시도하지 못했던 심리 치료도 받고 싶었고요. 원가족에서 벗어나 오롯이 제 삶을 즐겁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아버지가 운영하던 사업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상황이 달라졌어요. 경제적 타격을 입은 채 점점 연로해지는 부모님을 보면서 그 모든 꿈이 사치스럽게만 느껴집니다. 마음 한편에 부모님을 부양하지 않고 제 인생을 사는 것이 사치스럽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어요. 내 앞길만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부모님을 외면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듭니다.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주지는 못했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저를 사랑으로 키워주신 분들이니까요. 부모님은 별거를 하고 계시는데 나중에 생활비를 보내드린다고 하더라도 양쪽으로 보내야 해요. 경제적 능력이 없는 어머니와 빚이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저는 외동딸이고, 부모님 두 분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유년 시절 부모님이 큰 소리를 치고 몸을 밀치며 싸우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어요. 많을 때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싸우셨습니다. 부모님이 싸울 때마다 저는 완전히 경직된 상태가 돼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어요. 대개 엄마가 언성을 높이고 아빠는 침묵으로 일관하셨죠. 부모님은 다툼과 별거, 화해를 반복하다가 최근까지도 따로 지내고 계십니다.
엄마와의 관계는 좋은 편이었어요. 유년시절엔 애정 표현을 잘해 주는 엄마로부터 행복감을 느꼈어요. 그런데 아빠와 싸울 때만큼은 공격적인 모습으로 돌변하셨죠. 화가 나면 길을 가다 양산을 부수기도 하고, 택시를 가로채는 행인을 손으로 끌어내리는 등 격한 모습도 보이셨어요. 아빠와 크게 싸운 뒤에는 몇 달간 엄마를 따라 집을 나온 적도 있어요. 온화하고 수용적인 엄마와 함께할 때는 행복했지만 공격적인 엄마의 모습은 무섭고 충격적이었어요.
아빠는 말수가 거의 없는 분이세요. 아빠에게 저는 없는 사람 같았죠. 가족여행을 할 때도 말수가 없고 피곤해하는 아빠의 얼굴이 기억에 남아요. 나와 엄마가 즐거워도 아빠는 즐거워하지 않는 것 같아 쓸쓸함을 느낀 적이 많아요. 사춘기 시절에는 '아빠가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대학생이 되고 나서 자주 안부를 주고받으며 아빠가 표현에 서툴지만 노력하고 있음은 느낄 수 있었어요. 청소년기부터 아빠가 사업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안쓰러운 마음이 생겼고,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겼습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답답하고 안쓰러운 마음만 들어요.
힘든 일이 있으면 내색하지 않는 성격이라 혼자 앓았습니다. 대인 관계에서도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편이라 사소한 표현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어쩌다 이런 걱정을 주변에 내색하면 저에게 "네 인생을 살아"라고들 해요. 머리로는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압박감이 사라지지 않아요. 제 삶을 살며 부모님 두 분을 부양할 능력을 갖출 수 있을지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제 꿈과 여가 생활을 포기한 채 이를 악물고 살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 또한 망설여집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부모님에게 끌려다니는 삶을 살고 싶지 않지만, 그 실체가 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제가 나약하고 엄살을 부리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어요. 어떻게 해야 가족으로부터 느끼는 부담과 압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오롯이 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김은아(가명·28·직장인)
은아씨, 사연을 읽으면서 당신이 얼마나 책임을 다하며 애쓰고 살아왔는지 느껴졌어요. 타인의 마음을 예민하게 느끼고 먼저 배려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관계로부터 받는 상처도 컸을 거예요. 은아씨는 자신이 상대방의 특정한 면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까지도 잘 인식하고 있는 섬세한 사람입니다. 다만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본인의 그것보다 우위에 둔다는 점이 안타까웠어요. 어떤 관계에서도 우선시 돼야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에게 버겁고, 감당할 수 없다면 혼자서 짊어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은 먼저 하고 싶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우위에 둘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려면 다양한 인간관계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부모님과의 관계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세상에서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입니다. 부모의 적극적인 지지와 안정적인 정서적 교류 속에서 자녀는 다양한 갈등 상황에 부딪치며, 세상을 살아가는 기준을 만듭니다. 그 경험과 기준을 토대로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 가는 내면의 힘을 기르는 것이죠.
은아씨와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는 이런 경험들이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어린 은아씨는 아프고 충동적인 엄마로부터 불안감을, 무반응적인 아빠로부터 좌절감을 자주 경험했을 거예요. 은아씨 입장에서는 부모님에게 의지하기는커녕 일상적으로 맺는 관계조차도 편안하지 않고 불편했을 겁니다. 이런 경우 부모로부터 받는 불안과 긴장을 낮추기 위해서 무조건 갈등을 없애거나 회피하는 방향으로 패턴이 고착화됩니다. 부모님과 갈등을 피하기 위해 먼저 몸을 낮추고,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하는 것이죠.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이 돼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거나,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고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기 쉬워요.
의존과 독립은 모든 인간이 갈등하며 균형을 찾아가는 평생의 과제입니다. 특히 은아씨가 속한 초기 성인기는 부모에게 의존하려는 욕구와 부모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 사이에 부단한 갈등을 겪으며 균형을 찾아가는 시기입니다. 대다수 성인이 겪는 자연스러운 갈등 상황, 말하자면 심리적 통과의례인 셈이죠. 그런데도 은아씨는 독립적인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자신의 욕구를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그 상황 자체를 이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갈등 자체를 회피하려는 심리적 패턴이 정서적 독립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지요.
사연을 읽다 제가 주목한 점은 과거 부모님의 행동, 혹은 심리 묘사에 비해 본인의 감정에 대한 설명이 미흡하다는 점이에요. 부모로부터 정서적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어린아이 입장에서 느꼈던 감정을 되살리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갈등을 느꼈던 순간 피하기에 급급해서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진짜 감정 말이지요. 은아씨가 추구하는 독립이 머리로 아는 대로 마음으로 와닿는 것이 되려면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밑바닥 감정을 추스르고 헤아리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당시의 감정을 일기로 써도 좋고, 믿을 만한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거나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는 것 등 어떤 방법도 다 도움이 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의존과 독립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생 저울질하면서 균형을 잡아 가야 할 심리적 과제입니다. 다만 인생의 시기에 따라 어떤 부분에 포커스를 맞춰야 할지는 차이가 있겠지요. 누구나 성장하면서 부모와 멀어지고 독립을 추구하는 때가 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부모의 장단점과 그로부터 받은 영향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부로모부터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어요.
은아씨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그 과정에서 과도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갖고 있습니다. 부모님을 삶에서 완전히 떼어 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심리적 거리를 두게 되면 당장 마음이 불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스스로가 주체가 돼 삶을 독립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데 대해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시행착오를 기꺼이 받아들여 스스로 삶의 기준을 얻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은아씨가 되길 바라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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