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밀가루로 가늘고 긴 면을 내어 삶은 음식 한 그릇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소면'이라고 부른다. 흔히 소면에 대해 면이 가늘어서 붙은 이름으로 아는 경우가 많다. 조금 더 굵은 면을 시중에서 중면이라 부르는지라 소면에 대한 오해가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소면'은 원래 고기붙이를 넣지 않고 만든 국수이다. 소면의 '소'는 크기나 규모를 이야기할 때 붙이는 작은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소(素)'란 고기나 생선을 쓰지 않고 채소류만으로 만든 음식이다. 요즘 자주 들리는 말로 비건(vegan) 음식인 셈이다. 상중(喪中)에 고기나 생선 등 비린 음식을 피하는 일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쓴다. 고기반찬이 없는 식사를 소밥, 소찬으로 부르고, 젓국을 넣지 않고 소금이나 장으로만 담근 김치와 깍두기는 소김치, 소깍두기로 부른다. 한마디로 소음식이란 육류 없이 채소류로만 차린 음식인데, 사람이 먹는 것의 기본이자 바탕이 채소류라고 보던 옛 삶의 태도가 묻어난다.
'소(素)'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바탕'으로, 희고 깨끗한 것이다. 그래서 흰 비단을 비롯하여, 무늬를 넣지 않았을뿐더러 장식을 덧붙이지 않은 옷감 등을 이 말로 부른다. 또 화장을 하지 않은 흰 얼굴을 '소안', 하얗게 차려입은 상복을 다른 말로 '소복'이라 했다. 우리 조상들은 흰 것을 바탕색이자 깨끗한 색으로 보았다.
단지 색깔만이 아니다. 평소에 늘 지니고 있는 바탕이 되는 생각을 '소의'라 했고,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성질을 '소질'이라 했다. 소질은 한 사람이 타고난 능력이나 기질이고,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적 상태에서 보이는 선천적인 태도이다. 특정 영역에서 보이는 재능과 끼, 재주는 소질에서 나온다. 바꿔 말하면, 소질이란 전혀 없는 바탕에서 나오기란 어렵다는 뜻이다. 꽃씨마다 다른 모양의 꽃을 피우듯, 다른 바탕은 다른 적성과 자질을 안고 있다. 첨단 소재, 전자 부품의 소재 등 무엇을 만들든 바탕이 되는 재료는 '소재'이다. 물건은 소재로 만들어진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키워지는 것일까? 사람마다 바탕이 다른 만큼, 바탕에서 빚어지는 소질도 다 다르다. 그 바탕을 존중하는 것이 삶의 기본임을 '바탕 소'라는 한 글자가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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