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다녔던 예술중학교는 고등학교와 한 건물에 있었다. 그리고 연습실도 아래위층 사이좋게 붙어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밤늦도록 연습실에 머무는 재미를 느낄 무렵, 첼로를 어깨에 메고 위층 연습실을 들락날락하던 고3 선배가 자꾸 눈에 밟혔다. 아래층에서 연습하던 나는 마치 수맥을 찾는 지관처럼 벽을 타고 내려오는 첼로 소리를 찾아 복도를 더듬거렸다. 귀를 벽에 바짝 대고 첼로 소리의 진동을 느낄 때면 심장이 먼저 미친 듯 쿵쾅거렸다. 전형적인 짝사랑의 증상이었다.
상사병을 전해 들은 친구들은 선배가 지나갈 때마다 공연히 내 이름을 소란스레 불렀다. 나는 창피하다며 기겁을 하고 도망쳤지만, 실은 어쩌지 못하는 이 마음을 그가 알기나 알까 안달복달했었다. 연습실로 달려갈 수 있는 방과 후 시간을 오매불망 기다렸고, 위층 연습실로 올라가는 그의 뒷모습을 멀찍이 훔쳐보며 그의 등에 업힌 첼로 케이스를 질투하기도 했다.
짝사랑도 진화하기 마련이다. 벽에 귀를 바짝 갖다 붙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았다. 그가 위층에서 연습하기 시작하면 나는 바로 아래층 연습실에서 그 곡의 반주를 슬금슬금 맞췄다. 반주의 양상도 점점 과감해졌다. 처음엔 수줍은 피아니시모(pp)로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다, 나중엔 열과 성의를 다한 포르티시모(ff)로 목청껏 외쳤다. 달빛도 교교히 비추는 밤이었으니 선배로서는 귀신이 합을 맞추는 것이 아닐까 오싹도 했을 것이다.
며칠 후에 참다못한 듯 그가 내려왔다. 연습실 문이 활짝 열리며 그가 진짜로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심장이 가장 먼저 발광했다. 알고 있었을 거면서 이제야 알았다는 듯 그가 말을 건넸다. "너였구나!" 짝사랑 끝, 사춘기의 풋풋한 연애는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짝사랑과 함께 맞물렸던 곡이 첼리스트에게 중요한 레퍼토리 중 하나인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였다. 아래층에서 몰래 반주하다 이젠 당당히 한 연습실에서 합을 맞출 수 있게 됐다. 피아노 파트를 통째로 외울 정도로 사춘기의 풋사랑은 열정적이었다.
수위 아저씨가 ‘연습 좀 그만하라’며 쫓아내면 우리는 종종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국기 게양대 옆에 나란히 앉았다. 별빛 아래 나부끼는 밤바람을 느끼면서 오늘 하루 연습이 어땠는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눴다. 선배는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뜬금없이 김소월의 시 ‘길’과 연결 지었다. 끝없이 길을 걷다가 ‘열십자 복판‘에서 방향을 상실한 나그네의 쓸쓸한 유랑이 1악장 방랑의 선율과 잇닿아 있다는 것이었다.
시대와 태생은 달라도 슈베르트와 김소월은 닮은 점이 많았다. 30대 초반 재능을 채 만개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것이나, 방랑자의 삶을 산 것이나, 이별의 정한을 사무치게 토로한 것이나, 단순한 형식과 민요의 정서에 주목하며 낮은 사람들의 삶에 애착한 것이나, 선배 덕택에 김소월의 시를 읽을 때면 슈베르트의 음악이 BGM처럼 떠올랐다.
슈베르트의 친구들이 결성했던 예술 동아리 ‘슈베르티아데’도 선배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밤마다 친구 집에 한데 모여 슈베르트의 작품을 연주하고 문학을 토론했는데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도 그 모임을 위해 작곡됐으니 대형 콘서트홀보다는 여기 작은 연습실이 훨씬 더 어울리는 음색이라 했다. 슈베르트를 김소월과 슈베르티아데와 연결 짓는 그의 박식함에 나의 팬심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맑고 선한 청년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오랜만에 만나 뵌 고등학교 은사님을 통해 그의 오래된 부고를 듣게 됐다. 하필 슈베르트처럼 서른한 살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기억 한편이 무너져 내린 듯, 혹은 다시 살아난 듯 심장이 아파왔다. 나에게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 소나타는 평생 동안 그때 그 시절과 분리되지 못할 곡이다. 회한의 감정이 그의 죽음을 기릴 수 있는 유일한 방식과 예의인 것일까. 별과 같이 순수했던 청년, 내내 행복한 여행이기를 기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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