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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15일 국내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의 원작 제목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물로 준 형벌로 평생 독수리에 간을 쪼아 먹힌 그리스 신화 속 인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맨해튼 프로젝트)의 연구 책임자였던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그렇게 빗댔다.
□오펜하이머는 전쟁 종식을 위해 세계 최고의 무기를 조국인 미국에 바친다. 유대인인 그는 핵분열 실험에 먼저 성공한 나치 독일이 원자폭탄을 손에 쥐는 건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봤다.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명분이 다소 희석됐음에도, 그가 만든 원자폭탄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돼 전쟁 승리에 쐐기를 박는다. 영웅이 된 건 잠시뿐, 그에게 찾아온 건 끔찍한 형벌이었다.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되며 토사구팽 당한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은 지나치게 끔찍한 장치여서 이제 전쟁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절대적 공포 앞에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논리였다. 믿음이 아니라 합리화였을 수도 있다. 소련에 원자폭탄 개발 과정을 공유하며 그 위험도를 낮추길 원했던 것을 봐도 그렇다. 원자폭탄 투하 후 과학자의 역할에 대한 그의 고뇌는 더욱 깊어진다. 원자폭탄보다 1,000배 정도 파괴력을 가진 수소폭탄 개발을 추진한 루이스 스트로스와는 극심한 갈등을 빚는다. 영화는 실제 핵분열보다 오펜하이머 내면의 핵분열을 쫓는 데 주력한다.
□2023년에도 프로메테우스가 있다. 인공지능(AI) 개발자들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조차 “AI 연구자들이 오펜하이머와 비슷하다”며 “결국엔 군사 인프라에 침투해 핵무기를 통제할 것”이라고 했다. 그들의 고뇌도 깊다. 50년 이상 AI를 연구하며 ‘AI 대부’로 불리는 제프리 힌튼 은 “핵무기와 달리 AI는 비밀리에 연구하면 밖에선 알 방법이 없다”고 위험성을 경고했다. AI 연구를 후회한다 했다가, 아니라 했다가 오락가락하는 것도 오펜하이머를 닮았다. “내가 아니어도 다른 누군가가 했을 것”이라는 위안도 비슷하다. 인류는 그렇게 언제 폭발할지 모를 원자폭탄을 안은 채 더 파괴력이 큰 폭탄(AI)까지 껴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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