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프리즘] 박선철 한양대 구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그는 스물네 살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절망스러울 수 있을까 싶은 표정을 짓고는 필자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제대로 이뤄놓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미래가 걱정되고 암울하기만 하다고. 자기가 처량하고 한심해 보인다고. 그래도 사람이 괜찮은 점이 하나는 있을 테니 찾아보자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점을 찾아볼 수가 없단다. 여태껏 뭔가 제대로 해본 게 아무것도 없단다.
흐음, 필자는 사십 중반을 넘겼음에도 딱히 대단한 성과를 이루지도 못했고 앞날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고민이 적지 않은데. 그래도 자기 고백의 욕망을 내려놓는다. 사는 게 뭔가를 이뤄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훈계하고 싶은 욕망도 내려놓는다. 꼰대가 억지로 위로하는 모양새가 될 것 같고. 결국 자기는 환자이고 선생님은 의사이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 같고. 그렇다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랬다간 면담이 산으로 갈 듯해서.
취업절벽시대! 요새 이 신조어가 자주 그리고 쉽게 쓰인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으레 그러려니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 막막함이 청년들 마음을 얼마나 집요하게 파고들었을지. 그래서 이제는 그 마음 전부나 일부가 돼 버렸을지. 취업절벽시대는 그런 막막함을 반영하는 표현이 아닐는지. 치열한 경쟁 속 생존만이 삶의 목적인 양 오해하고 있지는 않을는지. 한 사람은 시험에 떨어졌다며 모든 것이 끝난 듯한 표정을 짓고. 또 다른 사람은 사원증을 금메달처럼 걸고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을 짓고. 취업절벽시대 속 그들의 얼굴은 각기 다른 모양새를 지닌 고통을 드러내준다.
도대체 그가 경험했던 세상은 얼마나 차가웠기에. 지금 그는 오로지 절망 말고는 자신을 드러낼 것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필자를 바라보고 있을까? 분명 누군가는 그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봐 주었을 텐데. 지금 그는 그 소중한 순간의 감정을 떠올릴 수조차 없나 보다.
아마도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슬픔이 그를 서서히 침잠시켰을 것이고. 이내 오직 절망만이 자신을 체험하는 방식이었을 것이고. 절망이란 것이 섣불리 나가려고 하면 더욱 깊숙이 빠지는 수렁 같은 것이기에. 자포자기가 반복되었을 것이고. 그렇지만 이제 그 절망의 흑마법에서 벗어나게 할 주문을 진심으로 읊조려보자. ‘신데렐라’의 ‘비비디-바비디-부’처럼.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영화 '벌새'의 대사다. 사실 '벌새'는 독립 영화계에서 익히 알려져 그 작품성을 높게 평가 받아 왔다. 여기서 ‘손가락’은 실제적인 표현인 동시에 은유적인 것임을 잠시 언급한다. 각설하고 필자는 믿는다. ‘그래도’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을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다면. ‘그래도’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이 지닌 신비로움을 가슴 속에서 지켜낼 수 있다면.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어찌보면 너무나도 소박해 보이지만 어찌보면 너무나 엄청나고 위대한 가능성임을.
잠깐 재미없는 이론 얘기를 하면 인지 치료에서 우울증 환자는 자신, 경험, 그리고 미래를 비관적으로 믿는다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그 치료 목적은 잘못된 믿음 속에서 문제점을 찾아내 유연하면서도 합리적인 방식으로 ‘그 밖에 다른 생각’을 되찾게 하는 것이다.
마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더라도 그 뒤에는 여전히 태양이 찬란하게 비추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시커먼 하늘 아래에서도 따듯한 햇볕이 주는 안녕을 만끽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 자기혐오나 자기 연민 말고는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없다면. 지금 비관이나 염세 말고는 다른 표현으로는 미래를 설명할 수 없다면. 잠깐만 그 감정에 속지 말고 거리를 두자. 그리고 또 다른 주문을 가슴속으로 깊이 외치며 조금이라도 믿어 보기를 바란다. 아바 그룹의 ‘댄싱퀸’ 가사에 그 신비로운 주문이 있다. 부디 잊지 말고, 끝까지 기억해 내서, 반드시 지켜 내길 바란다. “기억해! 넌 정말 최고의 댄싱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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