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원과 국민 중 어딜 바라봐야 하나
與도 싫고 野도 싫은 이대로는 안돼
‘정치양극화 척결’ 공천 개혁돼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정당은 당원과 국민 중 어디를 더 바라봐야 하나. 내년 4월 총선을 대비하는 여야 정치권은 이 담론에 관한 총론부터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당원 숫자가 1,000만 명을 넘어선 것은 정당민주주의가 뿌리내린 결과다.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은 당원인 나라가 됐다는 얘기다. 중앙선관위가 2021년 집계한 규모는 더불어민주당 485만 명, 국민의힘 407만 명, 정의당 5만 명 수준이다. 정당 역사가 100년이 훨씬 넘는 영국의 보수당이나 독일 사민당은 많아야 40만 명에 못 미친다. 정치에 의욕적인 한국인의 특성이자 군사독재도 물리친 저항본능, 또는 조선 500년의 치열한 지도층 내 이론투쟁의 ‘피’가 이어진 증거나 다름없다. 자신이 당원인지조차 모르는 유령당원도 있겠으나, 인맥과 친분에 따라 입당원서를 의탁한 것 역시 크게 보면 특정 신념이나 지향점이 결집하는 정당의 이유와 어긋나지 않는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모두 당원의 힘에 의존도를 키우느라 분주하다. 국민의힘은 전당대회 때 국민여론조사 30%를 반영했던 18년 전 한나라당의 성과를 내던졌다. 당원투표 100%로 경선룰을 바꿨다. 민심을 받들겠다던 과거 천금 같은 무기를 버린 것이다. 5개월 전 그렇게 탄생한 김기현 당대표 체제가 지금 여론을 민감하게 반영하며 정국을 이끌고 있을까. 정반대로 용산 대통령실의 ‘여의도 출장소’란 비아냥을 듣고 있다. 윤석열 정부 집권당이 당원만 바라보며 일반국민은 간과해도 된다는 선언을 하고 출발한 셈이다.
민주당 쪽은 권리당원 비중 강화로 달려가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현 여권이 권위주의 정권의 하부조직에 불과했다면 야당에선 정당의 명맥이 이어져왔다. 김영삼, 김대중 ‘양 김’은 민주주의 쟁취의 공을 세웠지만 사당정치를 해온 한계까지 벗어나진 못했다. 정치적 의사결정의 주역이 국민 대중에게 넘어간 전환점은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노무현을 탄생시킨 국민참여경선제일 것이다. 그러나 당원집단의 위력은 그때와 차원이 다르게 커졌다. DJ가 만든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대중정당’이 강성지지층만을 위한 결사체로 바뀌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정당의 주인은 물론 ‘당비를 내는’ 당원이다. 월 1,000원(최소액)을 내는 ‘진성당원화’ 노력을 무시할 순 없지만, 정당은 매년 수백억 원의 국고보조금을 받는다. 대선과 지방선거를 치른 작년엔 정당보조금이 1,420억 원이다. 국민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고 막중한 책임감을 인식해야 하는 이유다. 당원중심주의로 갈수록 입맛에 맞는 극단적, 과격한 주장이 득세하게 된다.
국회의원도 정당의 이익만 대변하는 존재는 아니다. 지방의원과 달리 국익에 머리를 싸매는 국민 전체의 대표자여야 한다. 이를 위해 여야의 공천물갈이가 진영의 전사들로 채워지는 악순환을 막아야 한다. 의례적 중진용퇴론도 초선들이 사고를 치는 현실과 맞지 않다. 텃밭의 무기력한 중진은 도태시키되, 노장청이 조화를 이룬 전략적 공천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정치양극화 극복’이 총선의 시대정신이 돼야 한다고 본다. 공동체를 붕괴시켜 공멸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최근 수년간 지켜보고 있지 않나. 이대로라면 극좌·극우 포퓰리즘 전성시대로 폭주할 것이다. 극단과 배제의 정치 척결로 공천개혁 원칙을 세워야 한다. 이를 두고 여야가 경쟁해야 한다. 여도 싫고 야도 싫은 상황이 계속돼선 곤란하다. 유권자들은 철학자 플라톤의 말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들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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