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피란민 애환 담긴 절벽 위 마을
바다뷰에 예술 감성 더해져 '핫플'로
관광객 소음ㆍ쓰레기에 주민 떠나고
건물주는 예술가 내쫓고 카페 리모델링
6년 새 마을 인구 635명→322명 '반토막'
카페만 40곳... "문화적 다양성 사라져"
편집자주
엔데믹(코로나19의 풍토병화)과 유커(중국 단체 관광객)의 귀환이라는 희소식에도 웃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마을형 관광지 주민들이다. 외지인과 외부 자본에 망가진 터전이 더 엉망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은 국내 마을형 관광지 11곳과 해외 주요 도시를 심층 취재해 오버투어리즘(과잉관광)의 심각성과 해법을 담아 5회에 걸쳐 보도한다.
깎아지르는 듯한 해안 절벽 위에 알록달록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부산 흰여울문화마을. ‘한국의 산토리니’라는 아름다운 별칭을 가진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의 애잔한 삶이 녹아 있다. 전국에서 부산으로 피란민이 떠밀려 내려왔고, 부산 영도구 대평동에 있던 수용소에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은 누울 곳을 찾아 봉래산 가파른 기슭에 짐을 풀었다. 하지만 봉래산에서 바다로 내려오는 물줄기 때문에 지반이 약해 집을 지을 수 없는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공동묘지로 쓰였던 이유다. 그럼에도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던 벼랑 끝 피란민들은 가파른 절벽과 묘지 주변에 천막집을 짓고 살았다.
독립영화 감독 이모(45)씨가 마을에 터를 잡은 건 2019년 9월. 도시재생과 마을공동체 회복을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구상 중이던 그에게 마을은 한번 살아볼 만한 곳이었다. 영도의 대표 ‘달동네’였던 마을은 조선업 쇠퇴와 신도시 개발에 따른 인구 유출 및 고령화 등으로 슬럼화되고 있었다. 영도구는 이에 2011년부터 빈집을 리모델링해 지역 예술가들에게 창작 공간으로 내주면서, 집집마다 페인트를 칠했고, 담벼락에 벽화를 그렸다. 2013년 영화 ‘변호인’ 촬영지로 알려지며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다. 아기자기한 카페와 공방이 들어서며 마을이 살아났다. 그렇게 이씨도 방 두 칸짜리, 좁은 집에 이삿짐을 풀었다.
하지만 그는 불과 1년 반 만에 마을을 떠났다. 여름휴가철 ‘반짝’ 오던 관광객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사시사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해안 절벽에 있는 골목길(흰여울길)에 생기를 더해 주던 나무, 화단은 사라지고 덱이 깔렸다. 관광객이 다니기 비좁다는 이유였다. 관광객들은 이씨 집 계단과 옥상에 올라 사진을 찍으며 “이런 집에 사람이 사느냐”며 내부를 훑었다. 바다가 담긴 창문을 닫고, 주말에는 산으로 피신했다. 카페가 주거지까지 파고들자, 주민과 상인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이씨는 작품 주제를 ‘도시재생의 치부, 마을공동체의 와해’로 바꿨다.
캘리그라피(멋글씨) 작가 차우석(65)씨는 2020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새파란 2층 건물을 임대해 공방을 열었다. 건물 외벽과 조형물 곳곳에 감성적 서체로 ‘꽃처럼 빛나도록 살아야 한다’,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같은 글귀를 새겼다. 그가 흔적을 남긴 마을 담벼락 곳곳은 사진 명소가 됐다. 하지만 차씨는 쫓겨날 처지에 놓였다. 내년 4월 계약 만료를 앞두고 건물주가 ‘재계약 불가’를 통보했기 때문이다. “건물을 지저분하게 썼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이는 핑계일 뿐, 건물을 뜯어고쳐 카페를 열기 위한 목적이라는 게 차씨 생각이다. 그는 “마을이 점점 특색 없는 카페촌으로 변하는 것 같다. 문화 마을엔 작가들도 있어야 하는데…”라고 했다.
최근 국내외 관광객이 찾는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부산 흰여울문화마을이 ‘투어리스트피케이션(touristification)’에 몸살을 앓고 있다. 이는 마을이 관광지로 유명해지면서 원주민이 다른 곳으로 내몰리는 현상을 뜻한다. 실제로 ‘폭 30m, 길이 600m’에 불과한 작은 마을에 한 해 1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주민들은 “시끄러워 못 살겠다”고 마을을 떠나고, 치솟는 임대료에 마을을 가꿔 온 문화예술인들도 쫓겨나고 있다. 그 빈자리는 어디서나 볼 법한 카페로 채워지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선 “흰여울문화마을에서 ‘문화’라는 단어를 빼야 한다”는 자조가 나온다.
골드러시 뺨치는 '카페 러시'
26일 부산시에 따르면, 흰여울문화마을을 찾는 국내외 방문객은 2016년 29만 명에서 2019년 85만 명, 지난해 103만 명으로 가파르게 늘었다. 자본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관광객 특수를 노리고 외지인은 물론, 일부 원주민까지 너나 할 것 없이 카페 투자에 뛰어들었다. 바다가 펼쳐진 흰여울길 2층집(층당 59㎡ 규모)에 사는 김갑순(62)씨는 2019년쯤 집 앞 화단을 치우다 생판 모르는 관광객에게서 “8억5,000만 원에 집을 팔라”는 제안을 받았다. 김씨는 “옆집도 ‘집을 팔라’는 외지인의 끈질긴 공세에 시달렸다”고 귀띔했다.
집값은 폭등했다. 마을 주택 대부분은 국유지에 세워진 무허가 건축물이다. 이 때문에 지상권(건물)만 거래되는데, 핵심 상권인 흰여울길 쪽은 3.3㎡당 3,000만 원에 매물이 나오고 있다. 부동산업소 관계자는 “워낙 낙후된 곳이라 3~4년 전 시세가 3.3㎡당 500만 원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5~6배 폭등했다”고 말했다. 투자자들은 주택을 사서 싹 뜯어고친 뒤 ‘바다 조망’ 전면 통유리와 루프탑 테라스를 갖춘 카페를 열었다. 현재 마을 내 카페만 40곳(공사 중 3곳 포함). 전체 건축물 168곳(현장 확인)의 23.8%가 카페였다.
카페로 바뀌기 전 주택에 살고 있던 세입자들은 이삿짐을 쌀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 활황을 기회 삼아 집을 팔고 나간 원주민도 적지 않았다. 한 주민은 “관광객 때문에 시끄럽고, 달동네로 불릴 정도로 환경이 좋지 않으니 아랫마을 아파트로 많이 이사 갔다”고 전했다. 2016년 635명에 달했던 마을 인구(영선2동 15ㆍ16통)는 지난해 322명으로 49.3% 줄었다. 영도구 전체 인구 감소폭(14.4%)보다 훨씬 높다. 60대 주민 이모씨는 “주민 이탈로 약국도 없고, 마트는 딱 하나 남은 상황”이라며 “관광객은 넘치는데, 마을은 소멸하는 느낌”이라고 씁쓸해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졸업한 인근 남항초등학교는 1학년 입학생이 15명도 되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새벽 루프탑 파티… 통장의 절규 “마을 폭파시키고 싶다”
마을을 떠난 사람들은 차라리 사정이 나은 편이다. 남은 주민들은 소음과 쓰레기 등의 피해를 오롯이 감내하고 있다. 세상을 떠난 모친과의 추억 때문에 집을 떠날 수 없다는 김갑순씨는 “관광객들이 평상과 화단에 먹던 아이스크림을 버리고 가는데 정말 미칠 노릇”이라며 “주말에는 집 앞이 쓰레기통으로 변해 버린다”고 푸념했다. 토박이 진순여(70)씨도 “밤에 골목 내 불법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젊은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노는데 미치겠다”며 “통장을 맡고 있지만 마을을 폭파시키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2층이나 3층으로 불법 증축해 운영하는 루프탑 카페가 늘면서 사생활 침해도 심각하다. 판자촌이던 이곳은 지금도 집들이 1m도 안 되는 간격으로 붙어 있다. 카페 옥상에 오르면 주변 집 옥상부터, 심지어 내부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심종석 흰여울문화마을공동체 부대표는 “마을 주민에게 옥상은 마당 같은 공간인데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주민들은 이에 영도구에 무허가, 불법 증ㆍ개축 카페에 대한 강력한 대책을 요구하고 있지만, 구청 측은 “이행강제금은 부과하고 있지만, 강제 철거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현재 영업 중인 카페 37곳 중 25곳(67.6%)은 무허가다.
카페만 있는 마을은 지속 가능할까?
한국일보가 만난 주민 8명 중 “관광객 오지 말라”, “카페 안 된다” 같은 극단적 주장을 펼치는 이는 없었다. 이들의 주장은 명확하다. 마을형 관광지로서 주민, 상인, 관광객이 공존할 수 있는 균형점을 찾자는 것. 가령 관광객이 많은 흰여울길을 중심으로 상업시설을 만들되, 골목 내 주거지는 정주 환경을 보장하는 식이다. 하지만 행정당국은 묵묵부답이었고, 마을은 서서히 획일화됐다. 주민 ‘최애’ 맛집이던 아귀찜 가게도, 영도 출신 가수 강다니엘이 자주 찾던 횟집도 최근 1년 새 카페로 바뀌었다. 매년 주민과 예술가가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온 심 대표는 “이제는 모일 만한 주민도, 예술가도 없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은 차우석씨는 차기 공방 위치로 경남 산청의 남사예담촌을 알아보고 있다. 수많은 마을과 관광지를 거쳐온 그는 말한다. “전망 좋은 곳에서 커피를 마시더라도, 골목 안쪽에선 예술과 역사 등 문화적 정취를 느낄 수 있어야 오래갈 수 있어요. 마을 30% 정도는 문화를 보존ㆍ육성하겠다는 계획이 필요한 이유죠. 그런데 영도구청은 방관했고, 마을은 문화적 다양성이 사라진 획일화된 카페촌으로 전락했어요. 부산 다른 곳에도 바다뷰 커피숍이 넘쳐나는데, 이곳에 굳이 와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최근 영도구는 흰여울길에 있는 김갑순씨 화단과 평상을 치우겠다고 통보했다가, 김씨가 반발하자 철회했다. 수십 년 세월의 나무가 있는 김씨 화단은 흰여울길에서 바닷가의 강렬한 햇빛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김씨는 묻는다. “주민이 살아온 흔적을 없애고 깨끗하기만 하면 뭐하나요. 서울에 좋은 곳 많잖아요?”
<관광의 역습 - 참을 수 없는 고통, 소음> 인터랙티브 콘텐츠 보기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82517140000790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은 흰여울문화마을처럼 관광객의 지나친 유입으로 마을 소멸 등의 위기를 겪고 있는 마을형 관광지 11곳과 해외 주요 도시를 심층 취재한 <사라진 마을 : 오버투어리즘의 습격> 시리즈를 28일부터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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