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평창 봉평면 허브나라농원과 광천선굴
9월이면 강원 평창군 산골 봉평이 분주해진다. 이효석의 고향이자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라는 점에 착안해 1999년부터 이어오고 있는 마을 축제 ‘효석문화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은 소금을 뿌린 듯’하다는 소설 속 묘사를 현실에 재현해 산자락까지 파고든 좁은 들판이 온통 메밀밭이다. 축제가 열리는 봉평면 산골짜기와 장돌뱅이 상인의 또 다른 활동 무대인 대화면까지 이동하면 초가을 하루 나들이 코스로 손색이 없다.
최초의 주민 주도 축제, 효석문화제
소설에서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소재로 묘사된 메밀은 사실 흉년이나 기근이 심할 때 쌀과 보리를 대체하는 구황작물이었다. 꽃 모양도 볼품없고 특별한 향기를 뿜지도 않는다. 관상용으로는 턱도 없고 곡식으로도 크게 대접받지 못하는 작물이었다. 그럼에도 축제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건 ‘숨이 막힐’ 정도로 하얗게 산허리를 덮는 군집의 효과 때문이다. 메밀묵과 메밀국수가 다이어트 건강식이라는 인식도 한몫 거들었다.
올해 24회를 맞는 효석문화제도 메밀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알고 보면 주민 주도로 시작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축제다. 1993년 봉평면으로 귀촌한 이호순(80) 허브나라농원 대표가 들려주는 사연은 이렇다. 급격하게 인구가 줄어 소멸 위기에 몰린 봉평면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메밀꽃 축제를 열게 해 달라고 군에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메밀꽃 보러 이 촌구석까지 누가 오겠나?’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주민들이 직접 나섰다. 1999년 2월 10명의 마을 대표는 일본 정부에 메밀로 성공한 마을을 하나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인구 1,000명 남짓한 도야마현 도가촌(利賀村)이었다. 매년 2월 ‘소바축제’를 여는 작은 마을이다. 눈길을 헤쳐 3시간 만에 찾아간 마을에서 축제를 배우러 왔다고 했더니 담당 과장은 특별한 게 없다며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1년에 한 번 마을을 방문했던 사람들을 초청해 대접하는 행사지 축제라 할 수준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소박하게 주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당연히 음식값도 평소보다 싸게 받는다고 했다.
거기서 주민 대표단은 무릎을 쳤다. ‘군청에 요청한 우리가 잘못 생각했구나. 스스로 하자.’ 그래서 그해 가을 가장 ‘봉평스럽고 촌스러운’ 축제가 시작됐다. 축제 자금은 십시일반으로 모은 1억4,000만 원. 비탈밭에 메밀을 심고 부녀회에서는 국수를 뽑고 전을 부쳤다. 외지인에게 보여 줄 거라곤 도리깨질 정도뿐이었다. 마을 농악단도 없어진 터라 급한 대로 대학생 풍물패를 불러 흥을 돋웠다. 한 2만 명 오면 대성공이다 했는데 첫해에 5만 명이 방문했다. 해마다 관광객이 늘어나자 3년 후부터는 이때까지 외면했던 군수와 도의원 등이 앞장서서 후원에 나섰다.
메밀밭과 2002년 개관한 이효석문학관 외에 특별한 볼거리가 없었던 마을도 차츰 관광지로 정비됐다. 문학관 주변은 ‘효석달빛언덕’이라는 테마공원으로 단장했다. 복원한 초가 생가와 함께 근대문학체험관이 들어서 있다. 체험관으로 들어서면 반투명 실크에 투영되는 메밀밭 풍경이 소설보다 좀 더 오래된 과거로 관람객을 안내한다. 이효석이 활동했던 1920~1930년대 근대문학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공간이다. 뒤편 언덕으로 나가면 이효석이 평양에서 생활했던 ‘푸른집’을 재현해 놓았고, 메밀밭을 환히 비추던 대형 보름달 조형물도 설치해 놓았다. 장꾼들의 등짐을 나르던 나귀는 전망대 겸 작은 도서관으로 꾸며졌다.
약 1.7km 떨어진 산자락에는 ‘이효석문학의숲’이 조성돼 있다. 아담한 숲길을 따라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주요 장소와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가벼운 산책으로 소설 속 정취에 흠뻑 빠질 수 있는 공간이다. 식생도 뛰어나 최근 강원도로부터 공식 산림욕장으로 지정받았다. 문학의숲 초입도 온통 메밀밭이다. 주변에 상가가 없고 농가만 띄엄띄엄 있어 옛 모습 그대로다.
이곳에서 약 3km 떨어진 무이예술관 주변에도 메밀밭이 드넓게 조성돼 있다. 옛 초등학교를 개조한 예술관 내부에는 메밀꽃 화가 정연서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새하얀 메밀만큼이나 이제는 사라진 허름한 농가와 마을 풍경이 향수를 자극하는 그림들이다. 올해 효석문화제는 9월 8일부터 17일까지 열린다.
둘이 합쳐 100세 부부가 일군 허브나라농원
봉평면 소재지를 관통하는 하천을 거슬러 오르면 흥정계곡이다. 냉수성 어류인 송어, 산천어 등이 서식하는 맑고 차가운 계곡이다. 경치 좋은 피서지로 알려지면서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15가구 정도가 살던 계곡에는 이제 대형 캠핑장과 펜션이 도로가 끝나는 곳까지 들어섰다. 숙소를 이용하지 않으면 사실상 계곡물에 발을 담그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그럼에도 오가는 차량이 꾸준한데, 계곡 중간쯤에 허브나라농원(입장료 8,000원)이 있기 때문이다. 1996년 문을 연 한국 최초의 허브농원이다. 이호순·이두이 부부가 한국 나이로 둘이 합쳐 100세가 되던 1993년 봄부터 일군 농장이다. 공대와 농대 출신인 부부는 7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무엇보다 ‘나이 들면 시골 가서 농사짓고 살자’는 마음이 맞았다. 남편 이호순 원장은 고향인 전라도를 비롯해 전국을 둘러봤지만 너무 밋밋하고 사람도 많아 마음에 닿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대학 때 무전여행을 한 기억을 살려 봉평을 다시 찾았다. “흥정계곡을 지나는데 집은 띄엄띄엄 있고, 사람은 거의 없어. 솔밭 좋지 계곡은 기가 막혀 바로 여기다 했지.” 그렇게 계곡물이 휘감는 산자락 돌밭을 구입해 일궜다. 감자 옥수수 등 힘든 농사 말고 즐겁고 재미있는 농사를 해 보자 시작한 게 허브나라의 시작이었다.
부부에게 허브는 향기 나는 식물(향초)만이 아니다. 약초와 향신료, 향미채소 등 땅에서 자라는 거의 모든 식물이 허브다. 150여 종의 허브로 꾸며진 10개 테마정원은 계절마다 색과 향을 달리한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농원에 첫발을 들이면 요즘은 분홍빛 꽃자루의 털여뀌가 반긴다. 물가에 흔한 여뀌에 비해 키가 크고 꽃도 탐스럽다. 어린이정원으로 들어서면 루드베키아가 노랗게 덮여 있고, 맘스가든에는 메밀꽃도 보인다. 요즘 자작나무식당에서 판매하는 꽃밥은 베고니아 한련화 메리골드 등으로 장식된다. 이 원장은 후추처럼 향이 강한 페퍼민트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민트처럼 향이 강한 식물은 잎과 줄기를 손가락 사이로 훑어 코에 대면 특유의 향이 진하게 풍긴다.
셰익스피어 정원도 눈길을 끈다. 그의 작품마다 영국의 꽃과 식물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캐모마일은 밟으면 밟을수록 더 빨리 자란다고 하지만, 그래도 젊음이란 낭비할수록 그만큼 빨리 더 시들어 버리고 마는 법이다(헨리 4세).” 식물을 묘사한 작품 속 구절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다.
이맘때 방문객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의외로 농원 끝의 솔바람숲이다. 아담한 숲길은 특별할 게 없는데 솔가지가 드리워진 개울이 포인트다. 흥정계곡에서 갈라져 농원을 통과하는 얕은 개천에 벤치를 놓았다. 맑은 물에 발을 담근 채 담소를 나누고 소풍을 즐긴다. 허브나라에서만 가능한 피서법이자 계곡 휴식이다.
그 옛날에는 좋은 풍광을 찾아 이 깊은 계곡까지 올 필요도 없었다. 면 소재지 아래 하천변에 ‘팔석정’이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8개의 큰 바위가 절경을 이룬 곳인데, 강릉부사 양사언이 팔일경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신선처럼 즐겼다고 한다. 너른 바위에 소나무 몇 그루가 뿌리 내린 풍광은 여전한데, 정자도 없고 주변에 잡풀이 무성해 이제는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이다.
봉평 초입 도로변의 판관대(判官垈) 표석과 봉산서재도 눈여겨보는 이가 거의 없다. 판관대는 신사임당과 남편 이원수가 율곡 이이를 잉태한 곳으로 전해진다. 인근 봉산서재는 율곡과 화서 이항로를 배향하는 곳이다. 서재에서 내려다보면 바로 팔석정이다.
박쥐와 공존하는 석회암 동굴, 광천선굴
봉평은 영동고속도로 장평IC에서 북측으로 약 6km 떨어져 있다. 장평IC 인근에 황화코스모스 꽃밭(용평면 장평리 317-2)이 조성돼 있다. 잠시 가을 나들이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곳이다.
봉평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면 대화면이다. 면 소재지 조금 못 미쳐 석회암 동굴인 광천선굴(입장료 5,000원)이 있다. 지난해까지 여름철 ‘평창땀띠축제’ 때만 개방했는데 탐방로를 정비해 전체 850m 중 일부를 상시 개방하고 있다. 허목의 척주집(1663년), 유몽인의 어우집(1590년) 등에도 언급된 것으로 보아 동굴의 존재가 알려진 건 오래된 듯하다.
안전모를 쓰고 굴 안으로 들어가면 천장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내부 기온은 연평균 10.5도. 여느 석회암 동굴과 마찬가지로 서늘한 통로를 따라 다양한 모양의 석순, 석주, 종유석 등을 볼 수 있다. 광천리에 위치한 신선의 동굴이라는 뜻으로 광천선굴이라 하지만, 실제 주인은 박쥐를 비롯한 동굴 생물이다. 조명이 제법 밝은데도 탐방객 머리 위로 이따금씩 박쥐가 날아다닌다. 사람과 박쥐의 공존이 언제까지 가능할지 의문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