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P, 미국 스타트업 '스케일 AI' 자회사 실태 폭로
필리핀서 최소 1만 명, AI 위해 '로데이터' 분류 업무
"최저임금도 안 줘... AI 보완 노동 윤리적 논란 제기"
인공지능(AI)의 인간 착취. 사이언스픽션(SF) 영화 또는 소설에서나 볼 법한 얘기지만, 머나먼 미래의 일도 아닌 듯하다. 어쩌면 이미 현실화했다고 볼 만한 징후도 있다. 미국 AI 관련 기업이 프로그램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제3세계 노동자들을 최저임금도 주지 않은 채 부려먹고 있는 실태가 드러났다.
2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미 스타트업인 '스케일 AI'의 온라인 근무 플랫폼 리모태스크의 필리핀 이용자 30여 명을 인터뷰해 "AI 열풍의 뒤에는 해외 노동자 군대에 대한 '디지털 노동 착취'가 있다"고 보도했다. AI가 작동하려면 미가공 원자료(Raw Data·로데이터) 분류 작업이 필요한데, 리모태스크가 이런 일을 하는 필리핀 노동자, 곧 '인간'의 임금을 임의로 삭감하거나 지불을 지연 또는 취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AI, 저소득 국가 노동력에 의존"
스케일 AI는 알렉산드르 왕(26)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7년 전 설립한 회사다. 생성형 AI '챗GPT' 개발사인 오픈AI나 메타, 도요타 등을 고객으로 두고 있으며, 최근 미 국방부와도 수억 달러 규모 계약을 체결했다. 스스로를 "AI 패권 경쟁의 챔피언"이라고 칭한다.
거창한 타이틀과 달리, 스케일 AI의 주된 업무는 이미지나 영상에 태그(검색용 키워드)를 다는 것이다. 자율 주행 알고리즘이 영상 내 보행자와 야자수를 구별하거나, AI가 정치인과 유명인 초상화를 그리도록 여러 이미지에 이해 가능한 키워드를 끼워 넣는 식이다. 이를 위해 천문학적인 양의 데이터를 가공해야 하므로 AI 기업들은 원격 근무자에게 수당을 주는 온라인 플랫폼을 만들고 있다. 스케일 AI의 리모태스크가 대표적이다. 필리핀과 인도, 베네수엘라 등 저소득 국가에서 주로 활용되고 있다.
WP는 "AI는 기계 학습(머신 러닝)이 아니라, 저소득 국가의 노동력에 의존한다"며 "인간으로 구성된 '군대'가 로데이터를 AI 공급 원료로 변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필리핀에서만 200만 여명이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데, 리모태스크는 최소 1만 명을 고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업 부정확하면 임금 안 준다" 약관으로 으름장
문제는 'AI 보완 노동'의 확대에 따라 새로운 노동 착취도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리핀에서 신생 산업 규제가 없는 틈을 타 노동자들 임금을 착복한 리모태스크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고용 약관에 '작업이 부정확하거나 늦어질 경우 임금을 지급하지 않을 수 있다'는 내용을 삽입한 뒤, 이를 근거로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있다는 게 WP의 지적이다. 항의해도 임금을 조정할 방안은 사실상 없고, 심지어 업무 계정을 삭제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WP에 따르면, 리모태스크 전·현직 노동자 36명 중 임금 체불 경험을 호소한 사람은 34명에 달했다. 신문은 "그동안 AI 윤리 논쟁은 확증편향·가짜뉴스로 한정됐는데, 기업들이 노동 착취의 새 지평을 열고 있다"고 비판했다. 요나스 밸런테 영국 옥스퍼드대 인터넷연구소 연구원은 "스케일 AI는 고객에 대한 고품질 데이터 보증 책임 및 비용을 개별 노동자에게 떠맡겨 이익을 취한다"고 말했다.
AI 보완 노동의 윤리적 결함은 이뿐이 아니다. 지난 1월 미국 시사주간 '타임'은 오픈AI가 챗GPT의 윤리 기준을 높이는 작업을 위해 케냐 노동자를 시간당 2달러 미만에 고용했다며 "노동자들은 아동 성폭력, 자해, 혐오 발언 관련 단어 등을 분류하는 과정에서 정신적 피해를 호소했다"고 보도했다. '윤리적 AI'를 위해 인간을 상대로 '비윤리적 만행'이 행해진 역설적 현상이다.
그러나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한 저소득 국가에서 뾰족한 대안은 없다. 3년간 리모태스크에서 근무한 폴(25)은 WP에 "체불 임금이 얼마인지 셀 수도 없다.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인터뷰 한 달 후에도 그는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적절한 규제가 취해지지 않을 경우, AI에 종속될지도 모르는 인류의 미래를 예고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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