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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정권 안기부 출신 장관도 추모… 광주가 정율성을 기념하게 된 연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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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정권 안기부 출신 장관도 추모… 광주가 정율성을 기념하게 된 연원은?

입력
2023.08.3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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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부 시절 국내 소개
한중 수교 후 기념사업 활발
보수 정부서 행적 논란 전무
"정략적 이념 논쟁으로 변질"

전남 화순군 능주초등학교 외벽에 설치된 정율성 벽화. 뉴시스

전남 화순군 능주초등학교 외벽에 설치된 정율성 벽화. 뉴시스

광주 출신 항일운동가이자 중국 혁명음악가 정율성(1914~1976)을 기리는 역사공원 조성 계획을 두고 광주시와 국가보훈부 간 논쟁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정율성은 공산당 나팔수”라거나 “반국가적 인물”이라는 비판으로 공격 수위를 높였고 “장관직을 걸고 기념사업을 막겠다”며 나섰다. 강기정 광주시장은 “노태우, 김영삼 보수 정권에서 먼저 시작된 사업”이라며 맞받아쳤다.

보수 정권이 정율성을 기념했다는 말은 사실일까? 실제로 보훈부가 최근 정율성의 행적을 문제 삼기 전까지 그는 한중 우호를 상징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정율성 기념 사업이 시작된 지 30년이 다 되어 가지만,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 사례 한 건을 빼면 역대 정부에서 정율성을 둘러싼 논란도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그때는 맞았던 일이 지금은 틀린 일이 돼 버린 셈이다.

작곡가 정율성

작곡가 정율성


항일ㆍ공산주의가 뒤섞인 행적

정율성은 중국에서 ‘현대음악의 대부’라 추앙받는다. 중국인민해방군가인 ‘팔로군 행진곡’과 중국의 아리랑으로 통하는 ‘옌안송’을 비롯해 가곡, 군가, 동요 등 300여 곡을 작곡했다. 2009년 중국건국 60년을 맞아 ‘건국영웅 100명’에도 선정돼 중국인이라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정율성의 인생은 한국, 북한, 중국 등 세 나라에 걸쳐 있다. 정율성은 1914년 광주 양림동에서 태어나 19세 때인 1933년 친형을 따라 중국 난징에서 독립운동단체 의열단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다녔다. 독립운동단체 일을 하면서 음악공부를 병행하다 중일전쟁 발발 후 옌안으로 건너가 1938년 루쉰예술학원 음악학부에서 수학했다. 1939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이후로도 꾸준히 음악활동을 했는데 그 시기 만든 음악이 바로 ‘팔로군 행진곡’이다. 1941년부터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 등에 소속돼 일제 맞서 싸웠다.

정율성이 항일운동을 했다는 사실엔 큰 시시비비의 여지가 없다. 일제강점기 만주와 연해주에 근거지를 둔 독립운동가들은 중국공산당이나 소련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정율성은 독립운동가로 소개돼 있다. 정부도 그의 항일 행적을 인정하는 셈이다.

논쟁이 되는 건 해방 이후 삶이다. 정율성은 북한으로 귀국해 조선인민군 구락부 부장, 인민군협주단 단장으로 활동했다. 1950년 6ㆍ25전쟁 즈음 중국 국적을 취득한 그는 중국인민지원군과 함께 북한군 위문활동을 펼쳤고, 1951년 중국으로 완전히 돌아간 뒤로는 작곡 활동에 전념했다. 아내는 저우언라이 중국 초대 총리의 수양딸이자 중국 최초 외국 주재 여성 대사로 알려진 딩쉐쑹(정설송)이다.

하지만 해방 후 북한과 중국을 택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민족의 적’으로 규정하기엔 무리가 있다. 시대적 혼란상과 역사적 맥락을 거세한 ‘현재적 해석’이기 때문이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정율성이 일찌감치 중국으로 넘어간 건 김일성에게 숙청당할 위험 때문이었다”며 “오히려 남북한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인물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6ㆍ25전쟁 당시 정율성이 고전 악보를 약탈했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도 전시 상황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과거 딩쉐쑹을 직접 만났던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1976년 정율성 사망 후 딩쉐쑹이 남편 모국인 한국에 악보를 전달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로 오랜 시간 소중히 간직해 왔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율성 기념 추모 사업 일지

정율성 기념 추모 사업 일지


보수정권은 왜 정율성을 기렸나

정율성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1988년 노태우 대통령 재임 시절이다. 당시 서울올림픽 평화대회추진위원회는 ‘한중 우호의 상징’으로 딩쉐쑹을 초청했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로는 한중 양국에서 정율성을 기리는 움직임이 더 활발해졌는데, 김영삼 정부 때인 1996년엔 문체부 장관이 고전 악보를 기증한 딩쉐쑹에게 감사패를 전달했고 국립국악원은 정율성 작품 발표회를 개최했다. 당시 문체부 장관이던 김영수(81) 전 민주자유당 의원은 검찰과 국가안전기획부를 거치고 문민정부 초대 민정수석을 역임한 보수 인사다.

2005년엔 중국 문화부장이 정율성 생가를 방문한 데 이어 중국교향악단과 한국 국립합창단 등이 참여하는 국제음악제가 열렸고, 2007년에는 음악제 무대가 중국 베이징과 광주 두 곳에서 잇따라 마련되기도 했다. 2010년엔 정두언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정율성의 유족과 면담했으며,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중국 전승절 기념식에 참석해 정율성의 음악으로 꾸며진 퍼레이드를 참관했다.

전문가들은 정율성에 관한 재평가가 이뤄지려면 ‘정치인의 말’이 아니라 ‘학술적 재발견’에 근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현재 보훈부 논리대로라면 밀양의 김원봉이나 통영의 윤이상도 반국가적 인물인데, 밀양과 통영에 대해선 왜 문제삼지 않나”라고 꼬집으며 “광주의 정율성 기념사업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1996년 고전 악보를 기증한 정율성의 아내 딩쉐쑹 여사에게 기념패를 수여하는 김영수 문체부 장관.

1996년 고전 악보를 기증한 정율성의 아내 딩쉐쑹 여사에게 기념패를 수여하는 김영수 문체부 장관.

보수 정권에서 정율성 기념 사업이 한중 관계 개선이나 한중 협력 강화를 목적으로 활용됐다는 점도 지적된다. 2014년 방한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한중 우호에 기여한 역사 속 인물로 김구와 정율성을 꼽기도 했다.

광주에는 곧 완공되는 정율성 역사공원 외에도 정율성로, 정율성 동상, 정율성 생가 기념비 등이 조성돼 있다. 중국인의 존경심을 활용해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노력이었다.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역사가 평가해야 할 문제를 정치권이 들고 나와 해묵은 이념 논쟁으로 변질시켰다”며 “6ㆍ25전쟁이 남긴 여진과 트라우마에 대해선 아직 수용 능력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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