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통학버스 이용 강제지침 번복에도
체험학습 업계 "예약 다 취소. 손실 막대"
교사 "불법 책임 전가" 설익은 지침 비판
"체험학습 프로그램으로 도자기 1만5,000개를 만들어 놨는데 벌써 4,000명이 취소했어요. 인건비, 교구 제작비 다 물어줘야 할 판이에요."
18년째 체험학습업계에 몸담고 있는 나현우(55)씨는 요즘 전화 벨소리만 울려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5일 시작할 체험학습 예약을 취소해달라는 선생님들의 전화가 끊이지 않는 탓이다. 지난해 11월부터 잡아둔 9월 첫 주 예약은 일주일 만에 전부 없던 일이 됐고, 나머지 예약도 ‘보류’ 통보를 받았다. 손수건 염색, 미니 운동회 등 프로그램 준비에 쓴 돈 6,000만 원을 고스란히 허공에 날릴 처지다. 나씨는 31일 “이제야 숨통이 트이나 했는데, 설익은 정책에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토로했다.
초등학교 현장체험학습 이동 수단으로 ‘어린이통학버스’만 이용하게 한 정부 지침을 두고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국이 지침을 철회했는데도 후폭풍은 외려 커지는 모습이다. 체험학습 업계는 잇단 예약 취소에 막대한 손실이 불가피하고, 교사들은 그들대로 오락가락하는 정책에 어찌할 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다.
수급 간과한 지침... 체험학습 업계 고사 위기
32년간 체험학습업체를 운영해온 이홍주(66)씨는 “정말 죽을 맛”이라고 했다. 3,000만 원을 들여 심은 고구마 밭 규모만 1만6,500㎡(5,000평). 이씨는 “캐는 것도 일이지만, 보관할 냉장시설이 없어 맘대로 내다 팔 수도 없다”고 한숨 쉬었다. 여기에 처분이 어려운 책자와 교본, 한 달 반동안 고용한 50명의 인건비 위약금을 물어줘야 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발단은 교육부가 7월 일선 초등학교에 내려 보낸 공문 한 장이었다. ‘13세 미만 어린이가 현장 체험학습을 위해 이동할 때 반드시 어린이통학버스로 신고된 버스만 이용하라’는 내용이었다. 법제처는 지난해 체험학습용 이동도 도로교통법에 적용되는 ‘통학’에 해당된다는 유권해석을 내놨고, 경찰청이 7월부터 준수 여부 단속에 나서겠다고 교육부에 전하자 일선 학교에도 지침이 내려간 것이다.
하지만 어린이통학버스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을 간과한 게 패착이었다. 전국전세버스연합회가 집계한 올해 등록된 어린이 통학버스는 6,955대. 나라장터에 나온 상반기 초등학교 체험학습 전세버스 계약이 4만9,860대인 점을 고려하면 13.9%에 불과하다. 신고 차량을 이용하지 않으면 법을 어겨 과태료(30만 원)를 물게 되니, 결국 예약 취소 줄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연합회 관계자는 “전세버스를 노란색으로 칠하고, 안전띠도 어린이용으로 바꾸는 등 어린이통학버스로 개조하는 데 450만 원이 드는데 누가 바꾸겠냐”며 “연간 전세버스 수요만 10만 대인데 죄다 예약이 취소되게 생겼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불이익 받을까봐..." 지침 철회에도 혼란 지속
계속된 혼선에 교육부와 경찰청 등 관계부처는 25일 “걱정 없이 체험학습을 할 수 있도록 혼란 최소화 방안이 도출될 때까지 단속 대신 계도·홍보에 주력하겠다”며 사실상 지침을 철회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일반 전세버스를 이용해도 불법이 아니고, 설령 사고가 나도 교통사고 처리 외에 학교나 교사에게 과태료를 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바뀐 방침은 달아오른 교육 현장의 불신을 달래기에 역부족이었다. 울산교사노조는 28일 낸 성명에서 “사고가 발생할 경우 학교와 교사의 법적 책임은 고려하지 않고, 계도 기간이라 봐줄 테니 체험학습을 다녀오라는 건 교사에게 불법 행위를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실제 선생님들은 혹시 문제가 생길까 봐 일단 예약부터 취소한다고 한다. 연합회 관계자는 “전국 버스회사들에 하루에도 ‘괜찮으냐’ ‘책임을 지지 않느냐’는 교사들 문의가 수백 건씩 쇄도해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고 말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