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약과·개성주악 등 한식 디저트 인기
조리법 직접 배우는 '원데이 클래스'로 확대
SNS 통한 유행, 적극적인 체험 놀이처럼 즐겨
"발효하지 않고 바로 기름에 넣으면 폭탄처럼 터져요. 유튜브나 블로그 레시피를 보고 따라 하셨다가 망쳐서 오신 분들이 정말 많아요."
지난 1일 서울 마포구의 한 디저트 요리학원. 찹쌀가루, 중력분, 설탕, 생막걸리를 적당한 비율로 섞은 반죽과 씨름하는 20, 30대 젊은 수강생들에게 탁현실 써니스다이닝 대표가 개성주악 조리 시 주의할 점들을 설명하고 있다. 5분이고 10분이고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반죽을 치대느라 손목 힘을 제대로 쓰다 보니 '아이고' 소리가 날 때쯤 반죽이 완성된다. 정량의 반죽을 새알처럼 동글동글하게 빚어 가운데 구멍을 내고 나니 얼추 형태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뒤로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서서히 발효한 후 튀기는 작업은 20분 이상 걸린다. 부풀어 오른 반죽이 노릇해지면 기름에서 건진다. 계피, 생강, 조청 등을 졸여 만든 즙에 하나씩 담가 재우는 ‘즙청’ 작업으로 마무리한다. 조심스레 작업하는 수강생들의 표정에는 설렘이 엿보인다. 90분 동안 만든 20알 정도의 '나의 수제 주악'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사진부터 찍느라 바쁘다.
디저트 요리교실 '서양 7 : 한식 3' 이젠 정반대로
약과, 개성주악, 양갱 등 전통 디저트에 꽂힌 2030세대는 원데이 쿠킹 클래스(일일 요리 수업)로도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레트로 바람이 디저트에도 불어닥치면서 '약과 오픈런'(개점하자마자 달려가 구매하는 것), '약케팅'(약과+티케팅) 같은 신조어도 나왔다. 전통 디저트 열풍은 그새 또 진화했다. 단순히 사서 먹는 체험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만드는 일로 확장한 것.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 '약과 원데이클래스' '개성주악 수업' 등을 검색하면 전국 곳곳의 수업 정보가 뜬다.
케이크, 마카롱과 같은 서양 디저트 쿠킹을 주로 가르쳤던 써니스다이닝에서는 최근 전통 디저트 수업 비중이 급격히 높아졌다. 탁 대표는 "7년 전 처음 수업을 시작할 때는 양식과 전통 디저트 수업 비율이 7:3이었다면 지금은 정반대"라고 말했다. 경기 일산 신도시에서 10년째 디저트 요리를 가르치는 윤나나 서연가 대표도 "한식 디저트 수업의 수강 인원이 이전보다 3, 4배 정도 늘었는데 20, 30대 젊은 수강생들이 확실히 많다"고 전했다. 개성주악의 '수업 공지'를 보고 무슨 음식이냐고 묻는 경우가 많던 6, 7년 전과는 완전히 반응이 달라졌다. 윤 대표는 "전에는 본인이나 부모님의 고향이 개성인 수강생들이 많아 40, 50대 이상이 많았던 것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고 말했다. 최근 더 현대 서울 문화센터는 추석을 맞아 디저트 전문점 플레플레와 함께 퓨전 개성주악 요리 수업을 2회(각 정원 8명) 마련했는데 모두 조기 마감됐다. 백화점 인근 여의도 일대 30대 직장인의 수강신청이 많았다.
직장 동료들끼리 그룹 수업을 신청하기도 한다. 서울에 소재한 한 공기업에 다니고 있다는 강한나(가명·28)씨는 이달 초 사내 팀워크 향상을 위한 문화활동 프로그램 일환으로 팀 선후배들과 함께 원데이 클래스를 수강했다. 그는 "주변에 한식 디저트가 유행이라 관심이 있었는데 추석도 앞두고 있어서 약과를 만들어보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며 "생각보다 재밌는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SNS 통한 유행…"오픈런도 요리 수업도 놀이처럼"
전통 디저트 원데이 클래스는 비용을 꽤 들여야 하는 취미활동이다. 재료비를 포함한 3시간 남짓 수강료가 20만~30만 원대(2, 3인 소규모 수업 기준)다. 그럼에도 비싸게는 한 알에 5,000원이 훌쩍 넘는 시중의 주악 등의 수제 디저트 가격, 소량 판매로 오픈런을 해야 겨우 사 먹을 수 있는 맛집 상황까지 감안하면 기꺼이 투자할 만하다는 게 수강생들의 생각이다. 평소 요리에 관심이 없었다는 계나리(29)씨는 한식 디저트를 좋아해서 약과 수업에 도전했다. 그는 "직접 만들어 보니 정말 새로웠다. 완성된 약과가 시중에서 파는 약과보다 맛있다"며 수업을 추천했다.
전통 디저트의 유행은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촉발했다. 전통 디저트 맛집 오픈런 경험이 있다는 윤화정(35)씨는 유명 유튜버인 '여수언니' 영상으로 맛집들을 알게 됐다. 윤씨는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궁금했던 곳들을 자연스럽게 방문하게 됐다"며 "구하기 힘든 희소성이 인기를 끄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보통 전통 디저트들은 수제 생산으로 대량 생산이 어렵다. SNS는 오픈런을 하거나 요리를 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자랑하는 통로인 셈이다.
전미영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젊은층에게 이런 활동은 일종의 놀이라고 해석했다. 전 연구위원은 "약과를 먹기 위해 내가 줄을 섰고, 원데이 클래스를 들었고, 하는 경험들이 게임 속에서 각 단계를 정복해 나가는 것과 같은 재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할메니얼'(할머니+밀레니얼, 전통 취향의 젊은 세대) 혹은 '힙트래디션'(유행에 밝다는 의미의 힙과 전통을 뜻하는 트래디션의 합성어)과도 부합하는 현상이다. 약케팅도 하고 약과 만들기 수업도 듣는 등 약과에 푹 빠진 김정인(가명·28)씨는 "해외 과자나 디저트가 대중화되면서 오히려 희소성이 높은 전통 디저트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비슷한 이유로 한국 전통 먹거리에 대한 호기심을 보이는 외국인도 늘고 있다. 학교 프로그램으로 4주간 한국을 방문한 미국 워싱턴대 재학생 애니 투(20)는 친구들과 함께 약과 만들기 수업을 들었다. 평소 베이킹을 좋아한다고 밝힌 그는 "파전과 같은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데 전통 디저트를 직접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발 빠른 기업들 마케팅도…지속가능성은?
기업들도 발 빠르게 이 열풍에 뛰어들었다. 편의점들의 자체 개발 약과 상품들은 지난해 오픈런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올여름에는 국내 한 프랜차이즈 커피체인이 약과에 크림치즈와 버터 등을 접목한 디저트 2종을 내놓았다 출시한 지 60일 만에 누적 판매고 18만 개를 기록했다. 특히 MZ세대 소비자를 끌어당기기 위한 전략에 전통 디저트는 빠지지 않는다. 북극곰 캐릭터 '표곰이'를 내세워 젊은 브랜드 이미지 구축에 힘을 쏟는 대한제분도 신제품 통밀약과를 냈다. 밀가루 회사의 주력 제품인 곰표 통밀을 내세우면서도 2030 눈길을 끌 제품을 기획했다.
전통 디저트의 인기는 계속될까. SNS가 띄운 단발성 유행이라는 시각과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 고조로 지속성·확장성을 얻을 것이라는 전망이 함께 나온다. 전 연구위원은 "SNS를 기반으로 내가 음식을 먹고 만드는 개인적 경험을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가 인기의 큰 요인이라며 이 열풍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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