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은 자유민주주의 최대 강점인데
그 진위 가린다면 위축될 수밖에 없어
자유를 억압하는 ‘헛소리쟁이’ 경계를
“최근 우리 사회에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냉소적 평가와 가짜 다양성이 확산되고 있다.” 최근 열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에서 어떤 간부가 한 발언이다.
이 자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공산전체주의세력, 그 맹종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들은 허위조작, 선전 선동으로 자유사회를 교란하려” 한다며 확고한 이념을 강조했고, 김관용 수석부의장은 “혼란 속에서 나라를 지켜내신 구국의 지도자 바로 윤석열 대통령”이라고 말해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 상황에 나온 말이다.
이 행사 발언 중 ‘가짜 다양성’이 유독 뇌리에 남았다. 그중 가장 해로운 ‘헛소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헛소리란 미 프린스턴대 철학과 교수였던 고(故) 해리 G. 프랭크퍼트가 헛소리를 언어 철학적으로 규명한 책 ‘개소리에 대해(On Bullshit)’에서 사용된 철학적 용어다. 이 책 한국어판은 ‘개소리’라고 번역했으나, 독자의 품격을 고려해 헛소리로 순화했다. 프랭크퍼트는 복잡한 세상에 대한 다른 의견은 틀렸다고 단언하면서 자신의 견해만 옳다는 주장은 헛소리일 확률이 높다고 본다.
역대 대통령이 중요한 국정 방향이나 외교 원칙을 밝히는 기회로 삼던 광복절 축사마저 반공에 할애할 만큼 뚜렷한 이념을 지닌 윤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소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짜 다양성이라는 말은 다양성이란 실증적 개념에 진위라는 본질주의적 개념을 교묘히 덧붙여 중요한 사실을 호도한다. 다양성은 생물 종과 사회가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효율적 전략이다.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구성원 다양성을 최대한 유지해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다양성 존중은 ‘어떤 선택이 미래를 위해 최선인지 모른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가짜 다양성’이란 개념이 성립하려면 발언자가 변화 방향을 미리 알아 다양성의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헛소리다. 이런 헛소리는 다양성을 제한해 결국 변화에 대한 적응 유연성을 훼손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전체주의보다 우월한 결정적 요소가 다양성 존중이다.
국제정치를 연구해 온 그 민주평통 간부가 몰라서 헛소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유와 평화를 통해 통일을 이루려는 민주평통이 기본 목표에 위배되는 이념 단일화를 강조하는 무대가 되자, 엉뚱한 개념을 만들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프랭크퍼트는 헛소리와 거짓말의 차이에 주목하는데, 거짓말은 적어도 진리를 의식한 행위지만, 헛소리는 이를 외면한다고 본다. 헛소리를 하는 중요한 동기 중 하나가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위기를 모면하려는 술책이기 때문이다. 프랭크퍼트는 헛소리가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라고 말한다. 헛소리는 “거짓말과 달리 진리의 권위를 부정하지도, 그것에 맞서지도 않는다.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 규명되기 힘들 것으로 판단한다면, 진실을 말하거나 거짓말을 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래서 그럴듯한 헛소리를 하게 된다. ‘헛소리쟁이’가 자주 쓰는 전략은 자기 진술의 부정확성을 뒤로 숨긴 채, 자신은 정직하다는 걸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이 한발 더 나아가면 반대 의견에 대한 논리적 반박보다는 반대편에 대한 인신공격에 몰두한다.
자신의 견해를 밝힐 통로가 늘어나면서 전문가 가면을 쓰고 쏟아내는 헛소리가 점점 늘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추세일 것이다. 어쩌면 이런 헛소리 증가가 다양성 강화 측면에서 긍정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양성의 진위를 가린다며 사상과 표현을 억압하겠다는 헛소리만큼은 다르게 대처해야 한다. 특히 대통령이 “확고한 방향이 가장 중요하다”며 특정 이념을 강조하고, 양대 정당이 소수 의견을 배제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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