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 쓸 줄 모르는 아이들 늘면서
PPT, 팀플해야 하는 중학교만 가도 혼란
모바일만 접하고, 학교서도 PC 교육 사라져
선생님 이메일 어떻게 보내요?
중학교 3학년 영어 수행평가 시간. 답안지 작성을 마친 김모(15)양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다 쓴 에세이는 이메일로 제출하세요"라는 선생님의 공지 때문이었다. 띄엄띄엄 독수리 타법으로 어렵사리 글을 완성했건만 또다시 난관에 부딪힌 것이다. 김양은 여태껏 이메일을 한 번도 보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난처한 건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모르겠어요.", "저도요." 교실 곳곳에서 도움 요청이 쏟아졌다.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 기기를 접해 온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예기치 못한 컴퓨터(PC) 활용 능력 저하로 교육 현장의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출생한 세대를 중심으로 이런 경향이 뚜렷하다. ①PC보다 스마트폰, 태블릿 등 터치 기반의 모바일 기기를 친숙하게 써왔고 ②그동안 초등 교과에서 진행했던 기초 PC 교육마저 소프트웨어(SW) 교육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PC 포비아(공포증)' 현상은 고스란히 학업·업무의 진행 차질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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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 기초 교육 대신 SW 코딩 중심 교육으로
기존 정보기술(IT) 활용 교육을 SW 중심으로 바꾼 것은 2015년 개정 교육 과정부터다. 과거에는 초등학교에서 기초 PC 교육을 실시했다. '한컴타자'로 타자를 익힌 뒤 한글·엑셀·파워포인트 프로그램을 이용해 자료를 만들고 상당수 초등학생들이 각종 컴퓨터 활용 능력 자격증까지 땄다. 당시 교육과정을 수강한 대학생 김동환(24)씨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매주 수요일 6교시에 컴퓨터 교육을 받았다"며 "파워포인트, 아래아 한글 쓰는 법을 배우고 타자 대회에 나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시간을 코딩 등 SW 중심 교육이 대신한다. 초등학교는 실과 교과에서 5, 6학년 동안 17시간 이상, 중학교는 정보 교과에서 3년 동안 34시간 이상을 이수해야 한다. 물론 SW·인공지능(AI) 교육에도 PC를 쓰지만 주로 마우스로 블록 형태의 명령어를 조립하는 활동이다. 키보드 사용, 자료 제작 등 기본 PC 활용 능력과는 거리가 멀다.
초등 기초 PC 교육을 받지 못해도 학생들이 당장 느끼는 불편함은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중·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해 PC 쓸 일이 많아지면서 교육 현장의 혼란이 시작된다. 중학교에만 가도 PPT로 학교 숙제를 하거나 조를 이루는 팀프로젝트 수업이 늘어나 학생들과 교사들의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반 친구 23명 중 21명이 독수리 타법"
고교 1학년 최모(16)군은 "고등학생이 되니 갑자기 PPT 만드는 숙제가 쏟아져 애를 먹었다"며 "초·중학교 때 한 번이라도 해 본 친구들과 실력 차이가 크다고 느꼈다"고 토로했다. 올해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한 새내기 박정한(19)씨는 "전공 수업에 들어갔는데 한 친구가 '컨트롤 키가 뭐냐'고 물어 깜짝 놀랐다"며 "컴퓨터공학과 학생이지만 파일 이름 바꾸는 법, 단축키 사용법, 폴더 정리하는 법을 모르는 등 PC와 친숙하지 않은 이들이 여럿 있다"고 설명했다.
부모님 세대의 전유물이었던 '독수리 타법'을 쓰는 학생도 수두룩하다. 초등학교 3학년 김모(8)양은 "같은 반 친구 23명 중 21명이 독수리 타법"이라고 상황을 전했다. 이때 굳어진 습관으로 고생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중학교 3학년 김모(15)양은 "반에서 절반 이상은 독수리 타법이라 정보 시간에 줄 코딩을 배울 때 타자를 못 쳐서 수업을 못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고 강조했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백모(13) 양도 급하게 타자 연습을 시작했다. 그는 "중학교 정보 수업은 컴퓨터 쓰는 일이 많아 쉬는 시간에 혼자 연습 중"이라며 "원래 독수리 타법이었는데 그나마 110타 정도 나온다"고 말했다.
타자연습 가르치는 과외까지 등장
이에 기초 PC 교육을 받고 싶은 학생들은 방과후 학교 수업을 신청하거나 사교육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정모(9)양은 "3학년부터 특별 수업으로 코딩을 배우고 있다"며 "타자나 프로그램 활용법은 방과후 활동을 신청해야 들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기초 PC 활용법을 알려주는 과외 프로그램도 생겨났다. 유아동 교육·돌봄 매칭 플랫폼 '자란다'는 수학·과학 카테고리에 '타자연습'과 'PPT' 수업을 운영 중이다. 자란다에서 활동하는 선생님이 학생 집으로 찾아가 가르친다. 자란다 관계자는 "타자 연습, 컴퓨터 기초 사용 등에 도움을 달라는 학부모의 요청이 이어져 2019년 타자연습 수업을 정식으로 만들었다"며 "현재 초등 교육과정에서 배우기 어려운 컴퓨터의 구성 개념, 기초 컴퓨터 활용 방법 등을 다룬다"고 설명했다. 이어 "수업 개설 이후 지금까지 신청 수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초등학교 저학년 때 뗐던 타자연습이 때아닌 인기를 얻고 있다. 한컴타자를 운영하는 한글과 컴퓨터는 최근 프로그램 개편을 통해 소설·수필·시 같은 문학작품을 키보드로 따라 쓰는 필사 기능을 추가하기도 했다.
PC 사용법 알려주느라 진도 못 나가는 선생님들도 난감
교사들 역시 난감한 상황이다. 인천의 중학교 교사 전모(46)씨는 "문서 작업은 물론 캡스락(Caps Lock)·쉬프트(Shift) 키가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예상치 못한 부분을 하나하나 알려주다가 정작 진도는 제대로 나가지 못할 때가 있다"고 전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 기초 PC 교육을 받은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의 수준 차이가 굉장히 크다"고도 덧붙였다.
이런 상황에 맞춰 'PC 프리' 숙제를 내주는 학급도 생기고 있다. 중학교 1학년 백모(13)양은 "선생님께서 주로 손으로 쓰는 숙제를 내주거나 휴대폰으로 자료 조사할 수 있는 링크를 학급 단체 메신저 방에 보내주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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