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상작 [약(藥)큐정전:처방전쟁]
‘병원 앞 약국’에만 가야 하는 환자들
성분명 vs 상품명… 팽팽한 주장들
환자 입장도 충분히 고려해야
편집자주
한국일보 제4회 기획취재 공모전에 당선된 우수상 2편을 게재합니다. ‘약Q정전’에서는 ‘성분명 처방’과 ‘상품명 처방’을 둘러싼 양측의 주장을, ‘꿀벌 집단 실종과 네오닉계 농약’에서는 네오닉계 농약 사용에 허점은 없는지 그 실태를 조명합니다.
① ‘병원 앞 약국’에 가는 환자들
“같은 약인 것 같은데… 다른 약인가요?”
두 아이(10세, 5세)를 키우는 김은설(36)씨는 최근 첫째 아이 감기로 병원을 찾은 뒤 3일 치 약 처방을 받았다. 하지만 이렇다 할 효과가 없자, 김씨는 같은 계열의 다른 약과 ‘교차 복용’(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로 다른 성분의 약을 먹는 것)을 하려 했다. 하지만 약봉투에는 약 이름만 쓰여 있었고 약 성분은 따로 찾아봐야 했다. 김씨의 경우 아예 냉장고에 아이들이 복용하는 약 성분을 따로 적어 붙여 뒀다. 증상과 병명이 같은데도 병원에 따라 처방약 이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김씨는 “자주 가는 병원에서 처방하는 약 성분은 외웠고, 다른 약이면 인터넷에 검색해 본다”면서 “성분은 같은데 약 이름은 다르니 더 헷갈린다”라고 말했다.
“우리 약국에 이 약은 없어요.” 회사원 박영호(52·가명)씨도 상황은 비슷하다. 직업상 하루 종일 컴퓨터 화면을 봐야 해 퇴근 후 야간 진료병원에서 안구건조증약을 처방받았는데, 어렵게 찾아간 야간 약국에선 “처방전에 적힌 약은 우리 약국에 없다. 대체 조제도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런 사례는 우리나라의 약 처방 방식에서 비롯됐다. 한국은 ‘상품명 처방’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약을 처방할 때 약 고유 성분이 아닌 제약회사가 붙인 ‘제품 이름’으로 처방하는 것이다. 반대로 약 성분을 처방전에 명시하는 ‘성분명 처방’ 방식도 있다.
코감기 약인 ‘슈다페드정’의 경우, 상품명은 ‘슈다페드정’이고 성분은 ‘슈도에페드린염산염 60mg’이다. ‘상품명 처방’이라면 처방전에 ‘슈다페드정’으로 작성하고, ‘성분명 처방’이라면 처방전에 ‘슈도에페드린염산염 60mg’을 기재해야 한다.
제약산업정보포털이 발간한 ‘2023 혁신형 제약기업 디렉토리북’에 따르면 국내 의약품 생산업체는 609곳이고 생산 품목은 무려 2만7,395개에 달한다. ‘병원 근처 약국’이 아니면 약국에 해당 약이 없을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그래도 약국들은 판매 수익을 위해 처방받을 가능성이 높은 약들을 최대한 구비해 놔야 한다. 서울의 한 약사는 “약국은 좁은데 새로운 약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약국이 포화 상태”라고 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분명 처방 제도’가 의무가 아니다. 의료법 시행 규칙 제12조에 따르면, 처방전에는 약의 성분보다 ‘처방 의약품의 명칭’을 적어야 한다. 처방 의약품의 명칭은 △일반 명칭 △제품명 △대한민국약전에서 정한 명칭을 뜻한다. 약사법도 의사와 약사의 역할을 규정한다. 약사법 23조 3항에 따르면 ‘의사 또는 치과의사는 전문의약품과 일반의약품을 처방할 수 있고, 약사는 의사 또는 치과의사의 처방전에 따라 전문의약품과 일반의약품을 조제하여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처방전에 적힌 약이 없다면 약사는 ‘대체 조제’를 할 수 있다. 대체 조제란 원래 처방된 약과 같은 약효를 가진 약으로 바꿀 수 있는 제도다. 한국에서는 대체 조제가 합법이다. 약사법 27조 1항에 “약사는 의사 또는 치과의사가 처방전에 적은 의약품을 성분ㆍ함량 및 제형이 같은 다른 의약품으로 대체하여 약을 지으려는 경우에는 미리 그 처방전을 발행한 의사 또는 치과의사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문제는 과정이 복잡하다는 점이다. 약사가 대체 조제한 경우, 환자 동의를 받아야 하고 의사에게 통보도 해야 한다(약사법 27조 3항). 다른 성분의 약이 있는데도 의사가 대체하지 말라고 대체 ‘불가’라고 명시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2022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약국 대체 조제 건수는 190만5,000건으로 총 조제 건수(2억2,174만 건)의 0.79% 수준이다. 일본의 경우 2023년 대체 조제율은 79%다.
현행 ‘약품명 처방’ 방식이라면 환자들이 불편을 겪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취재팀은 성인 남녀 150명을 대상으로 ‘성분명 처방 및 상품명 처방’에 대한 설문 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갔는데 ‘약이 없다’는 말을 들은 경험이 있다”고 밝힌 비율이 32.7%(49명)에 달했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회정책국장은 “어르신들은 내과 약, 피부과 약을 많이 복용하는데 그 안에 위장 보호제는 대부분 비슷한 약”이라며 같은 약을 계속 복용할 가능성을 지적했다.
②성분명이냐, 상품명이냐… 엇갈리는 주장들
상품명 처방은 ‘의ㆍ약 분업’이 이뤄졌던 2000년대 초 도입됐다. 의약분업은 진료와 처방은 의사가, 의약품 조제는 약사가 담당하도록 역할을 분리한 제도다. 이후 의료계와 약사계 두 단체는 ‘처방전 기재 방식’을 놓고 팽팽히 맞섰다. 긴 논의 끝에 처방 약품의 성분을 밝히는 ‘일반명 처방’을 권장하되, 상품 이름을 적는 ‘상품명 처방’을 함께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약사 측은 “상품명 처방이 번거롭고 불편하다”는 입장이다. 취재팀이 만난 현직 약사 3명은 모두 상품명 처방의 불편함을 토로했다. 경기도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A약사(50)는 “대체 조제 제도가 있어도 무용지물”이라며 “환자 동의를 받고 병원에 사후 통보를 해야 해서 번거롭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약국에 없는 약은 제네릭 약(처음 개발된 약과 같은 성분으로 다른 제약회사에서 생산한 약)으로 대체 조제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경기 지역 B약사(33)도 “소아ㆍ청소년과 시럽의 경우 대부분 대체 조제가 안 된다. 그래서 병원에 사전에 동의를 구하고 처방 상품을 아예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C약사(35)도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여러 약국을 전전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고 했다.
환자들이 특정 상품 이름에 익숙해져 특정 약만 선호하는 것도 문제라는 입장이다. 코로나19 지정약국에서 근무했던 C약사의 경우, 여러 병원 처방전이 몰려 대체 조제 사례가 많았다. 그런데 ‘약이 없어 다른 상품으로 대체 조제해야 한다’고 환자에게 밝히면 일부는 ‘왜 약이 없느냐’고 화를 내는 사례도 이어졌다고 한다. C약사는 “처방받은 상품과 같은 성분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약도 없으면서 왜 여기까지 보내느냐’고 병원에 전화해 싸움까지 일어난 적도 있다”라고 전했다. 같은 효능을 가진 약임에도 불구하고 처방받은 상품과 다르다는 이유로 불신이 생긴 것이다.
반면 의사 측은 “성분명 처방은 환자 건강에 도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오리지널 약과 제네릭 약이 100%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약 유사 정도는 △생동성 시험(생물학적 동등성 시험) △비교용출 시험으로 판단한다. 생동성 시험은 같은 성분의 두 약의 동등성을 판단하는 시험이고, 비교용출 시험은 두 약 성분이 얼마나 비슷하게 녹는지 확인하는 시험이다. 비교 약물이 80~125% 유사하면 같은 효능의 약이라고 분석한다. 이 때문에 정확도가 낮다고 의료계는 분석한다. 두 실험은 약의 유사성을 증명할 뿐 같은 성분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 관계자는 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80~125%라는 기준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 유럽, 일본 등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신뢰 기준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의사 판단 외의 요인이 치료에 개입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대한병원의사협의회는 “하나의 약을 선택하는 과정은 오랜 시간 축적된 의사의 학습과 경험을 토대로 환자 개인의 특성을 고려해 이루어진다”며 “의도와는 다른 효과를 보이는 약제가 환자에게 투여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고는 환자 치료에 전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의료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도 불분명하다. ‘상품명 처방’으로 처방한 뒤 처방약에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은 해당 의사에 있다. 하지만 ‘성분명 처방’의 경우 책임 소재가 모호해진다. 의사는 약사가 약을 선택했기에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고, 약사는 의사가 처방한 성분의 약을 제공하니 의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대한병원의사협의회는 “성분명 처방을 했을 때 사고가 발생하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③소비자 입장도 충분히 고려해야
의약계가 ‘성분명 처방’과 ‘상품명 처방’으로 갈등하고 있지만 이 논의에 정작 환자들의 목소리는 작다.
취재팀이 성인 남녀 1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82%(124명)가 ‘처방전을 읽어본 적 있다’고 했고, 51.3%는 평소 복용하는 약의 상품명을 알고 있었다. ‘모른다’는 34.7%, ‘복용약 없음’은 14%였다. 특히 ‘인터넷으로 처방전 약 성분을 검색한다’는 응답자도 있었다.
이렇듯 이제는 환자들도 자신이 복용하는 약품에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지만 정작 ‘성분명-상품명’ 논의에서 환자들의 목소리는 제외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2년 우리나라 1인당 의약품 판매액은 760.9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547.2달러)보다 높았다. 치료비 중 약값이 차지하는 비율도 높은 편이다. 2017년 기준, 경상 의료비 대비 약제비(의약품 및 기타 의료소모품 지출 비용)는 20.9%였다. 의약분야 선진국(A7ㆍ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일본, 영국, 스위스) 평균(13.7%)은 물론, OECD 평균(16.7%)보다 월등히 높다.
상품명 처방으로 하나의 약만 사용할 수 없다면 소비자 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예를 들어 해열진통제 A제품과 B제품은 같은 효능을 갖고 있지만 가격은 다르다. A제품은 ‘오리지널 약’으로 가격은 1정당 450원이지만, ‘복제약’인 B제품은 1정당 29원에 불과하다. 두 제품은 성분이 같다.
복제약이 널리 공급되면서 약값이 줄어든 사례도 있다. 의약품시장조사기관 아이큐비아에 따르면 6개 항암ㆍ항염 성분 제재(인플릭시맵, 에타너셉트, 트라스투주맙, 리툭시맙, 아달리무맙, 베바시주맙)의 국내 처방량은 2021년 154만7,799바이알이었으나 2022년 167만3,032바이알로, 전년 대비 8.1%포인트 늘었다. 그러나 처방 금액은 약 4,124억7,200만 원에서 약 4,071억7,300만 원으로 1.3% 줄었다. 처방량은 늘었으나 처방액은 줄어든 것이다. 남 국장은 “성분명 처방을 하면 약 처방에 소비자의 편의성을 주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현재는 의사가 약 처방권을 독점하고 있는 구조다”라며 “의약품 리베이트 등의 불건전 구조에서 부풀려지는 의료비 거품 등 부당한 구조에 대한 사회적 감시 효과가 있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주무부처인 식약처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식약처는 지난해 12월 대한의사협회에 보낸 공문에서 “성분명-제품명 처방은 주무부처 주도로 의약정 등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 한다”고 밝혔다. 의약계뿐만 아니라 정부와의 긴밀한 논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궁극적으로는 국민을 위한 논의가 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남 국장은 “약 처방 권한을 두고 의사와 약사 간 기득권 경쟁 속에 소비자가 배제돼 있다”며 “국민의 약 섭취 편의와 의료비 절감을 위해 저가약 리스트를 만드는 등의 장치를 정부가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해관계로 덮인 갈등 뒤에 숨은 의료 약품의 본질적 역할을 새겨야 할 때가 왔다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외국 사례는 어떨까? 프랑스는 2002년 정부 권고 사항으로 ‘성분명 처방’ 제도를 의무 시행 중이다. 의사가 내리는 처방의 25%가 성분명 처방일 때 환자 1명당 의사에게 5유로의 인센티브를 지급한다. 환자 입장에선 복용약의 성분을 알 수 있고 같은 성분의 저렴한 의약품을 선택할 수도 있다.
캐나다는 성분명 처방이 의무는 아니다. 다만 대부분의 주에서 대체 조제가 의무화돼 있다. 위 캐나다 처방전을 보면 대부분의 약품이 성분명으로 표시돼 있다. 약국에서는 갖고 있는 약을 성분에 맞게 조제하면 된다. 캐나다에서 약국을 운영 중인 김성대 약사는 “캐나다에서는 환자의 특별한 요청이 없는 한 가지 회사의 약만 준비하면 된다”라고 전했다. 미국 역시 주마다 법이 달라 성분명 처방이 의무는 아니지만 상당수 의사들은 성분명 처방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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