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자 살자 싸워도 단식 땐 만났던 한국 정치
YS도 DJ 만나… 최근까지 관행 이어졌지만
여당, 비판 여론 의식한 듯 "방문 계획 없다"
한국 정치에 보기 드문 양보의 미덕마저 사라질까. 평소 죽기 살기로 싸우다가도 야당 대표가 단식이라는 초강수를 두면 여당 대표가 찾아가 못 이긴 척 서로 손을 잡고 끝내는 게 관행이었다. 이렇게 성사된 만남은 막힌 정국에 물꼬를 트기도 했다. 하지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단식을 바라보는 국민의힘 반응은 냉랭하다. 부담을 느끼기는커녕 일부러 무시하며 야당을 외면하고 있다.
군부독재 이후 단식 중인 야당 대표를 처음 찾아간 건 김영삼(YS)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이다. YS는 1990년 10월 지방자치제 도입을 내걸고 김대중(DJ) 평화민주당 총재가 사흘째 단식 중이던 당사를 전격 방문했다. 둘은 그해 초 '3당 합당'으로 완전히 갈라선 상태였지만 YS는 '단식 후배'인 DJ를 만나 단식을 만류하며 자신의 경험담까지 들려줬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DJ가 단식 8일 차에 건강악화로 입원하자 YS는 병실로 찾아갔다. 이후 YS는 여야 협상 전권을 부여한 당 사무총장을 병원에 보내며 마음을 돌리려 애썼다. 물론 당시에도 야당 대표의 단식을 두고 '숨은 의도'를 의심하는 시선이 없지는 않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DJ는 훗날 자서전에서 "이 같은 계획(지자체 도입)을 알리는 정부·여당의 연락을 받고 단식을 풀었다"고 회상했다. 그 결과 DJ는 성과를, YS는 민심을 얻었다. 서로 상생한 셈이다.
2018년 당시 야당인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김성태 원내대표, 2019년 황교안 대표가 단식 투쟁에 나섰다. 여당 지도부는 어김없이 단식장을 찾았다. 홍영표 의원이 민주당 원내대표로 선출된 당일 김 원내대표의 손을 맞잡자 그날로 단식을 풀었다. 황 대표의 단식 때는 이해찬 민주당 대표를 비롯해 이낙연 국무총리까지 현장을 방문했다.
심지어 여당 대표가 단식투쟁에 나서자 야당 대표가 찾아가는 진풍경도 있었다. 2016년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이정현 대표는 민주당(당시 야당) 출신 정세균 국회의장의 사퇴를 주장하며 돌연 국정감사 보이콧 단식에 돌입했다. 초유의 사태에 민주당 의원들은 온갖 폄훼와 조롱을 쏟아냈다. 하지만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이 대표를 찾아가 손을 잡으며 단식 중단을 권유했고 결국 단식은 중단됐다. 정 의장도 입원 중인 이 대표의 문병을 다녀왔다.
현재 우리 정치권은 다르다. 이 대표가 한창 단식 중인 국회 본관 앞 천막을 방문한 대통령실·여당 지도부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7일 '방문 계획이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 대표가) 단식하고 계신가요"라고 되물으며 일부러 외면했다. 앞서 김 대표는 이 대표를 향해 "땡깡 단식을 아무리 하더라도 국민들께서 더 이상 속지 않고 사법 리스크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비판한 바 있다.
5일부터 국회에서는 대정부질문이 열렸지만 여당은 코앞에 있는 이 대표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대정부질문 도중 민주당 의원으로부터 "쓰레기"라는 발언을 들은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항의하러 불청객으로 찾아온 게 유일한 경우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수준이 아니라면 그 전에는 방문 계획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단식 회의론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굳이 나서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대표의 요구조건을 정부·여당이 수용하기 어려운 터라 협치의 문이 닫힌 측면도 있다.
이내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8일 "야당 대표의 단식 목적이 불분명한 데다 여당 대표의 자율성까지 부족한 상황이라 정국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쉽지 않다"면서 "한국 정치가 DJ·YS 때보다 오히려 퇴행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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