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자 연간 150만명… 태평양전쟁 때 수준
대도시 화장장 11일 대기도… 안치소 늘어
“무연고자 죽음 급증, 생전에 대비” 지자체도
편집자주
일본은 한국의 '미래의 거울'이란 말이 있습니다. 저출생·고령화처럼 일본이 먼저 겪은 사회·경제적 현상이 시차를 두고 한국에도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죠. 한국에서 주목하고 알아둬야 할 일본 구석구석의 이야기를 도쿄특파원이 3주마다 들려드립니다.
시신 호텔을 아십니까
상아색 천을 덮은 시신이 놓인 작은 방. 시신 위엔 고인이 생전에 가족과 찍은 사진, 그리고 손자가 그린 듯한 그림이 놓여 있다. 테이블, 의자, 소파가 갖춰진 방은 시신만 빼면 평범한 응접실을 닮았다.
유족은 시신과 한 공간에서 며칠간 생활하며 조문객을 맞고 장례식도 치른다. 시신이 화장터로 향하기 전엔 온 가족이 방에 모여 마지막 이별을 한다.
일본 도쿄도 가쓰시카구에 있는 시신 안치소 ‘소소안 카논’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소소안 카논은 '시신 호텔'이라고도 불린다. 화장 전까지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보관하는 여느 시신 안치소와 달리 유족의 생활공간까지 제공한다는 의미에서다. 2018년 소소안 카논을 설립한 미무라 아사코 대표는 한국일보에 “유족이 충분한 애도 기간을 갖고 고인과 이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고 했다.
시신 호텔이라는 독특한 업태가 생겨난 것은 일본이 사망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다사(多死) 사회’에 진입하면서다. 사망자 급증으로 화장장이 부족해져 화장 대기 기간이 길어지자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안치소를 찾는 수요가 늘어났고 업태가 다양해진 것이다.
화장 대기일 길어져 시신 안치소 수요 늘어
‘다사 사회’란 말 그대로 죽는 사람이 많은 사회다. 인구의 20% 이상이 65세 이상인 ‘초고령사회’의 다음에 도래하는 사회 유형이다. 고령자가 영원히 살 수 없는 만큼 초고령사회는 예외 없이 다사 사회로 넘어간다. 한국에도 닥칠 것이다.
올해 6월 발표된 일본 인구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의 사망자는 역대 최다인 156만 명(전체 인구 1억2,242만 명 중 1.27%)에 달했다. 다사 사회가 현실이 된 것을 알리는 수치였다. 지난해 출생아는 77만 명이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일본 인구는 전년 대비 80만 명 감소했다.
이전 사망자 최다 기록은 일본에서 스페인독감이 유행한 1918년의 149만 명이었다. 태평양 전쟁(1941~1945년) 중 사망자 공식 통계는 남아 있지 않지만 전문가들은 지난해 사망자가 전쟁 당시 연평균 사망자 수에 육박할 것으로 본다. 일본 국립사회보장·인구문제연구소는 앞으로도 당분간 사망자 증가세가 지속되다 2040년 167만 명으로 정점을 찍고 점차 줄어들 것이라고 추산했다. 다만 감소세가 천천히 줄어들면서 2070년까지 연간 사망자가 150만 명을 웃돌 전망이다.
다사 사회는 일본인들이 죽음을 겪는 과정을 바꾸었다. 가장 먼저 닥친 변화는 화장장 부족으로 인한 화장 대기시간 증가다.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공익사단법인 전일본묘원협회가 전국 화장장과 장례식장을 대상으로 화장 순서가 돌아올 때까지 대기하느라 시신을 안치한 최대 기간을 조사했더니, 6~8일이 31.4%로 가장 많았다. 2, 3일은 16%, 3, 4일은 13.7%였다. 일본 기초지방자치단체 중 인구(377만 명)가 가장 많은 요코하마시에선 화장 대기일이 지난해 평균 5, 6일에 달했고, 최대 11일까지 대기한 경우도 있었다. 요코하마시는 221억 엔(약 2,006억 원)을 들여 새 화장장을 건설하고 있다.
요코타 무쓰미 전일본묘원협회 이사는 한국일보에 “화장 대기 시간이 늘어난 것은 요코하마나 도쿄 같은 대도시가 겪는 문제"라며 "인구가 이미 급격하게 감소한 지역에서는 돌볼 사람마저 사망하면서 묘지나 납골당이 버려지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도시에서도 언젠가는 사망자가 줄어들 것이므로 화장장을 무작정 늘리는 것이 최선의 해법이라고 할 순 없다”면서 “화장장의 회전율을 높이고 시신 안치소를 늘리는 방안이 좀 더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무연고 사망자 급증... 일본선 지자체가 화장, 납골
더 심각한 문제도 있다. 무연고 사망자의 급증이다. 과거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의 죽음이 무연고 사망의 다수를 차지했다면, 다사 사회 진입 후에는 신원이 확인되는 사람이 무연고 사망자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일본 전체 가구의 3분의 1이 1인 가구인 데다, 초고령사회에선 부모와 자녀가 모두 고령이 되면서 마지막 가는 길을 서로 챙겨 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취약계층만의 일이 아니다. 1980년 미국 드라마 ‘쇼군’에 출연해 일본인으로선 처음으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시마다 요코는 지난해 7월 직장암으로 사망했지만 유골 인수자를 찾지 못했다. 도쿄 시부야구청이 2주 정도 시신을 보관하다 화장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지인이 유골을 인수해 부모의 묘에 안치했다.
지난 3월 일본 총무성이 발표한 무연고 유골 조사(2021년 10월 기준) 결과에 따르면, 전국 지자체가 보관하고 있는 무연고 유골은 약 6만 기에 달한다. 이 중 90%가 신원이 확인됐음에도 유골을 수습할 사람을 찾지 못했거나 찾아도 인수를 거부해 지자체가 떠맡게 된 경우다. 일본에선 유골 인수자를 찾지 못하면 지자체가 유골을 대신 인수해야 한다. 시신의 운반, 보관, 화장의 책임이 모두 지자체에 있다. 비용도 지자체가 부담한다. 오사카시에선 연간 사망자의 10%가 무연고 사망에 해당한다.
요코스카시, 독거 노인 생전에 '종활' 지원
'죽음의 사회안전망'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무연고 사망자 대책에 일찌감치 나선 지자체들도 있다.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는 혼자 사는 저소득 노인의 ‘종활(終活)’을 지원하는 ‘엔딩 플랜 서포트 사업’을 2015년부터 실시했다. 종활이란 스스로의 사망에 대비해 장의업체와 계약하고 신변 정리를 하는 등의 활동을 가리킨다. 사업 대상자는 최소 장례 비용인 26만 엔(약 236만 원)을 내면 시청과 제휴된 장의업체와 미리 계약을 맺을 수 있다.
계약자는 연고자가 없어 시신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을 덜 수 있고, 종교에 맞는 장례 방식도 택할 수 있다. 지자체 입장에선 사망자의 연고자를 찾아다니는 행정력을 절약할 수 있고, 장례 비용으로 투입되는 세금도 줄어든다. 지난해엔 요코스카시 무연고 사망자 77명 중 16명(20.8%)이 생전에 종활 계약을 맺었던 것으로 집계됐다. 이에 따라 시 당국이 절약한 장례 비용은 416만 엔(3,769만 원)이다.
요코스카시는 나이, 소득 수준, 동거자 유무 등을 따지지 않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당신의 종활 등록제도'를 2018년 신설했다. 시신을 인수해 장례를 치를 가족·지인의 연락처, 계약해 둔 장의업체의 정보 등을 시청에 미리 등록해 두는 제도다. 사고나 질병으로 갑자기 사망했을 때를 대비해서다.
"죽음 이후 과정에도 관이 개입해야"
두 제도의 시행을 주도한 요코스카시 민생국의 기타미 가즈유키 복지전문관은 “가난한 독거노인이 ‘내게 15만 엔밖에 없지만 이것으로 불교식 화장을 해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사망한 것을 보고 매우 안타까웠다”며 종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죽음 이후의 과정을 개인의 영역에만 맡겨 둘 수 없다"며 “개인정보를 등록해 두었다가 경찰과 응급의료기관 등과 공유하고 장의업체의 사후 계약 이행을 보증하는 것은 민간 분야에선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기초지자체 1,700여 곳 중 요코스카시와 비슷한 제도를 도입한 곳은 아직 16곳에 불과하다. 독거노인을 찾아가 설득하는 등 장의 업무 부담이 늘어난다는 점이 걸림돌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달 혼자 사는 고령자에 대한 중앙·지방 정부의 상담 체계를 강화하겠다고 밝혔으나 정책 구체화에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일본종합연구소의 사와무라 가나에 연구원은 “과거에는 간병 의무를 가족이 전부 떠안았지만 한계에 닥치자 국가가 간병을 지원하기 시작했다”며 “다사 사회에서는 죽음 이후의 절차에 대해서도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의 역할엔 공백이 있기 마련인 만큼 개개인이 50, 60대 때부터 미리 죽음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