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영화제 '이준익 감독 데뷔 30주년 특별전'
안성기, 박중훈과 '라디오 스타' 상영회 참여
박중훈 "존경하는 선배... 요즘 모시고 다닌다"
“오래전부터... 서로를 잘 알아서... 연기할 때… 하여튼 그렇습니다.”
목소리는 쉬었고, 힘이 약했다. 생각을 바로 언어로 전달하는 데 힘겨워 보였다. 배우 박중훈은 “몸이 많이 좋아지셨으나 말하시는 건 아직 예전 같지 않다”며 “제가 선배님 생각을 잘 아니까 대신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혈액암 투병 중인 배우 안성기는 1년 전보다 훨씬 좋아진 모습이었으나 대중 앞에 서기에는 아직 조금은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10일 오후 서울을 벗어나 강원 춘천시를 기꺼이 찾았다. 제10회 춘천영화제가 마련한 이준익 감독 데뷔 30주년 특별전 참석을 위해서였다. 안성기와 박중훈은 이날 춘천시 메가박스 남춘천에서 영화 ‘라디오 스타’(2006) 상영을 마치고 이 감독, ‘라디오 스타’에 출연했던 배우 안미나와 함께 관객들을 만나 질의응답을 나눴다.
안성기와 박중훈에 청룡영화상 안겨줬던 영화
이 감독은 ‘키드캅’(1993)으로 데뷔했다. 도둑을 퇴치하는 아이들 이야기를 다뤘다. ‘범죄도시3’에서 귀여운 악당 초롱이를 연기해 눈길을 끈 고규필과 중견배우 정태우의 데뷔작이다. 이 감독은 관객 1,230만 명이 본 ‘왕의 남자’(2005)를 비롯해 흥행작이 적지 않다. 하지만 ‘아픈 손가락’이라 할 영화가 많기도 하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과 ‘평양성’(2011), ‘변산’(2018) 등 흥행 못한 영화들”(이 감독)이다. ‘라디오 스타’도 관객(159만 명)을 많이 모으지 못했으나 이 감독에게는 흥행작 못지않게 “특별하다”. “안성기 선배와 박중훈씨가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했고, 명절이면 TV에서 가장 많이 방영해주는 한국 영화가 됐기 때문”이다.
‘라디오 스타’는 1988년 가수왕을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으나 폭행과 마약 복용 등으로 퇴물이 된 가수 최곤(박중훈)과 그의 곁을 20년 가까이 지킨 매니저 박민수(안성기)를 스크린 중심에 세운다. 최곤이 강원 영월군 방송국 라디오DJ를 하며 새로운 삶을 도모하게 되는 과정을 해학적으로 전한다.
원래는 퇴물 가수와 라디오PD의 사랑이야기였으나 스타와 매니저의 사연으로 내용이 바뀌었다. 이 감독은 “두 배우 캐스팅만을 염두에 두며 시나리오를 썼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두 사람의 오랜 우정을 감안했다”고 덧붙였다. 박중훈은 “영화 촬영 이전 이미 안 선배와 저는 서로를 몰랐던 기간보다 인연을 맺은 시간이 더 오래된 관계였다”고 말했다. “영화 촬영하며 현실인지 연기인지 구분이 잘 안될 정도”였다고도 돌아봤다.
"소주 한 병 들이켜고 녹음한 '비와 당신'"
‘라디오 스타’는 주제곡 ‘비와 당신’으로도 유명하다. “실존하지 않았던 유명 가수 최곤을 위해 방준석 음악감독과 의논하며 여러 차례 수정해 새롭게 만든 곡”(이 감독)이다. 박중훈은 “영화배우지만 히트곡이 하나 있어 꿈만 같다”며 “요즘도 밤 10시 넘으면 (술 마신) 지인들이 전화를 해 이 노래를 부르곤 한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당시 노래 녹음할 때 찾아갔는데, 중훈씨가 감정 잡기 힘들다며 소주를 병째 다 들이켰고, 맥주까지 더 마신 후 녹음했다”고 뒷이야기를 전했다.
‘라디오 스타’가 영화 데뷔작인 안미나(출연 당시 예명은 한여운)는 “라디오에 출연해서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서럽게) 우는 장면을 연기하는데 감독님이 눈물을 흘리셨던 기억이 있다”고 돌아봤다. 이 감독은 “너무 마법 같은 순간이라 그랬다”며 “지금도 미나씨 당시 연기로 오디션에 나서는 배우들이 많다”고 거들었다. 안미나는 ‘라디오 스타’에서 영월군 다방레지 김양을 연기했다.
행사가 끝난 후 이어진 저녁자리에서도 대화꽃은 피어났다. 축하를 위해 방은진ㆍ봉만대 감독이 춘천까지 달려왔다. 안미나가 대만 여행 때 가져온 고량주가 잔을 채웠고, 식탁에는 막국수와 수육이 올라왔다. 30 숫자가 꽂힌 케이크로 이 감독 데뷔 30주년을 축하하기도 했다. 박중훈은 “1980ㆍ90년대는 TV드라마 출연을 해야 전국적인 인지도가 생기던 시절이었는데, 안 선배는 영화 연기만 했다”며 “저도 존경하는 선배를 따라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칠수와 만수’를 시작으로 영화 4편을 같이 했는데 ‘라디오 스타’가 (두 사람 호흡으로 빚어낸) 모든 감정이 다 들어간 완성형 영화”라고 돌아봤다. 옆에 앉은 안성기는 박중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이준익 감독 "중훈씨가 박민수 됐네"
저녁자리가 파한 뒤 안성기는 박중훈 차에 올라탔다. 박중훈은 “안 선배 소속사(아티스트컴퍼니)가 챙기려 하지만 공식적인 자리가 있을 때마다 제가 매번 모신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영화와 달리) 중훈씨가 박민수가 됐네”라고 말하며 웃었다. 주변에서 작은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이날 모임은 식당 앞마당에서 기념 촬영을 하며 끝났다.
이날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김형석 춘천영화제 운영위원장은 “17년 전 영화인데 ‘라디오 스타’를 17년 후 보시는 분들도 마음의 치유를 받는 기분일 것”이라고 말했다.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디오 스타’에는 영국 그룹 버글스가 부른 팝송 ‘비디오 킬드 더 라디오 스타(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나온다. 비디오(TV)의 등장으로 라디오가 쇠락한 상황을 표현한 노래다.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는진 몰라도 시간은 ‘라디오 스타’를 죽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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