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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60대 이상 영화인들이 배우 안성기를 부르는 별명이 있다. ‘안스타’다. 1980~90년대를 관통하며 한국 영화계 최고 별로 통했던 배우에게 붙을 만한 호칭이다. 스타라는 단어가 붙었으니 거리감이 느껴질 만도 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영화인들은 저 호칭을 친근함을 표시할 때 주로 사용한다. ‘안스타’ 앞에는 ‘우리’가 곧잘 붙는다. 어떤 행사장에 안성기가 나타나면 “우리 안스타 오셨네”식으로 애정을 드러낸다.
□ 다섯 살 때 ‘황혼열차’(1957)로 데뷔한 안성기는 고교 진학 이후 연기를 중단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후 연기를 재개했다. 성인배우 안성기는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로 눈길을 잡더니 ‘적도의 꽃’(1982),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등 화제작에 잇달아 출연하며 충무로 중심을 차지했다. 하지만 한국 영화는 1960년대 황금기에서 침체기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안성기는 강수연(1966~2022)과 더불어 당시 한국 영화 버팀목이었다.
□ 1980년대는 TV드라마 전성기였다. 드라마에 출연하면 전국적 인지도와 더불어 인기와 돈이 곧바로 따르던 시절이었다. 동료배우들과 달리 안성기는 곁눈질하지 않고 영화에만 출연했다. 드라마에 나오지 않으니 그를 잘 모르는 이들이 있기도 했다. 커피 광고에 출연한 후에야 ‘커피 아저씨’라며 알아보는 이들이 늘었다. 안성기는 당대 최고 스크린 스타였으나 출연료를 쉬 올리지 않았다. 한국 영화계가 어려운데 혼자서 많은 돈을 벌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 2000년대 들어 고위직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안성기에게 잇따랐다. 그는 매번 손사래를 쳤다. “영화와 연기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게 거부 이유였다. 안성기는 지난해 9월 혈액암 투병 사실이 밝혀져 국민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영화계 대소사를 꼬박꼬박 챙긴다. 지난 6월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식을 찾았고, 지난 6일 정지영 감독 데뷔 40주년 회고전 개막식에도 참석했다. 10일엔 이준익 감독 데뷔 30주년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배우 박중훈) 그는 진정한 스타, ‘안스타’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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