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시즌2 : 실패연대기] <17>배우 김혜수②
“청춘 바친 연기의 의미 대체 뭔가...
그 답 찾는 데 실패해 여기까지 왔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아. 어쩌면 이 계영배처럼 작은 구멍이 뚫려 있을지도 모르지. 사실 국모인 나도 구멍이 숭숭 나 있다. 스스로 만족한다면, 꽉 채우지 않아도 썩 잘 사는 것이다.”
(드라마 ‘슈룹’, 임화령)
배우 김혜수가 2017년 영화 ‘미옥’을 끝냈을 때다. 집에 초대한 친구들이 돌아간 새벽, 누군가 틀어놨던 TV에서 영화 ‘밀양’(2007)이 재방영되고 있었다. 한 번 봤던 작품인데도 빨려 들어갔다. 10년 전 처음 봤을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 올라왔다.
자막이 올라가는 걸 본 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한겨울의 새벽이었다. 영화의 울림과 차디찬 공기가 뒤섞여 그의 뇌를 깨웠다.
“그래, 연기는 저런 분들이 하는 거지. 너 그동안 완전 애썼다.”
스스로 머리도 쓰다듬었다. “정말 충분히 수고했어.”
-그건 어떤 감정이었나요.
“연기는 저런 놀라운 분들이 하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경이로웠어요.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런 일을 지금까지 내가 해온 게 용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알잖아요, 내가 얼마나 애썼는지. ‘이 정도면 너 정말 애썼다. 저런 분들이 연기하는 속에서 새우등 터지지 않고, 남한테 티도 안 내고 꿋꿋하게 해낸 게 어디야. 대견해.’ 그런 생각이 들었죠.”
-스스로 안쓰러웠던 건가요.
“비애나 자조 같은 감정은 아니었어요. 개운하고 산뜻했어요. 그런 감정이 드는 날이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기분이 좋더라고요. ‘나 그간 충분히 최선을 다했다. 그거면 됐지 꼭 1등을 해야 하나. 꼭 무슨 의미를 찾아야 하나. 그걸로 충분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죠.”
영화 ‘국가부도의 날’(2018) 시나리오가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의 필모그래피는 거기서 끝났을지도 모를 일. 그는 “시나리오를 보고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감정이 든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영화 ‘밀양’, 그리고 ‘국가부도의 날’이 그에게 준 자극은 곧 그가 ‘연기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자신에게 연기의 의미는 뭔가요.
“연기는 내가 정말 많은 시간을 할애한 일이자, 내 인생을 구성하는 굉장히 큰 요소예요. ‘원하건, 원치 않건’이란 수식어를 붙이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지금의 나에 도달하는 결정적인 과정이었죠. 연기로 성장했어요, 나는. 배우로서의 시간, 개인적인 시간 그걸 구분할 필요도 없죠.”
-지금까지 연기를 해온 이유, 또 그렇게 만든 힘은 뭘까요.
“나 스스로 명분을 찾고 싶었어요. 그 명분이란 나한텐 의미죠. 내 시간을 규정하는 의미.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내 시간의 결정권이 없이 살았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내겐 시간이 아주아주 중요해요. ‘10대는 차치하고라도 내 청춘의 대부분을 연기에 바쳤는데, 그럼 그 시간의 의미가 뭐지?’ 그 의미를 찾으려고 이 시간을 연장해온 거예요. 40대까지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찾았나요.
“그 의미를 찾는 데 실패해서 여기까지 왔죠. 나 스스로를 바라보는 눈이 생긴 것일 수도 있고요. 연기에 쏟아부은 시간 동안 내가 어떤 배우인지를 알고 싶었거든요. ‘남들이 규정하는 나’가 아니라 ‘내가 규정하는 나’. 그것만 알았다면 당장이라도 그만뒀을지 몰라요. 배우들이 흔히 하는 말 있잖아요. ‘배우란 일이 참 힘들고 고통스럽죠. 그렇지만 한순간의 희열이 여기까지 오게 했어요. 그걸로 만족해요.’ 그런데 나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걸 못 느끼는 거예요.”
못내 아쉽고 애달픈 감정이 그의 눈과 표정에 고스란했다.
-그런 말 많이 들었겠지만, 자기 자신을 너무나 냉철하게 봐서 그런 것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이 ‘왜 그렇게 겸손해요, 왜 그렇게 자신한테 야박해요’라고 하는데 난 아니거든요. 정말 모르겠어요. 닿지를 않는 거예요. 나는 (연기의 희열, 의미를) 정말 느끼고 싶은데, 너무나 절실한데 말이에요. 그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는데 너무 짧았어요. 너무 찰나여서 ‘이건가, 이게 맞나, 아닌가’ 싶고.”
-의미를 찾는 데는 결국 실패한 건가요.
“그렇죠. 그런데 그러다 이런 생각에 이르렀어요. 현장에서 (연기한 장면을) 모니터로 볼 때는 참 시니컬해지거든요. 어느 순간 모니터링을 하다가 그런 걸 느꼈어요. ‘아, 나는 이런 배우구나. 한 20%쯤 부족하구나. 그래, 이런 배우도 있어야지. 이게 나의 고유성인데.’ 그렇게 나를 인정하게 된 거죠.”
-그러고 나니 달라지는 게 있던가요.
“좀 편해진 것 같아요. 이러다가도 ‘왜 죽어도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나한테 너무 섭섭하기도 하고, 내가 너무 싫어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는 게 아니라 ‘나는 이런 배우지’라고 인정해요. 나를 인정하는 훈련이라고 해야 하나, 나를 새롭게 하는 과정이라고 해야 하나. 그 단계에 진입한 지 몇 년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것도 꽤 괜찮아요. 나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느낌이죠.”
◇결과로 성패 재단? 과정이 전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항상 깨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
(영화 ‘국가부도의 날’, 한시현)
-예전에 “배우나 연기가 내 전부일 수도 없고, 실제 그렇지도 않다”고 한 적이 있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말 그대로 배우가 자신의 전부가 될 수는 없지 않나요. 배우로 쌓아온 이력이나 받은 트로피 같은 것만으로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끼면 위험하죠. 배우는 그저 직업이에요. 다만 남들이 얼굴을 아는 직업. 배우를 ‘아티스트’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난 연기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고 아트도 좋아하지만, 연기하면서 예술을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저 내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온 거지. 심지어 체력도 좋아서 아마 나보다 더 성실하긴 힘들 거예요. 하하. 타고난 재능이 별로 없어서 난 성실해야 해요. 뒤늦게라도 그걸 깨달아서 다행이에요. 성실한 데에 재미를 붙인 거죠.”
성실 없는 성장은 없다. “20%쯤 부족한 배우”라거나 “타고난 재능이 없다”는 박하고 박한 그의 자기 평가를 존중한다 쳐도, 그가 ‘성장하는 배우’라는 데에 이견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도 정상의 자리에 있는 배우가 성장하기 쉬운가. 성장이란, 본디 높은 수준에서 출발할수록 그에 따르는 노력도 훨씬 커져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이 배우는 그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치열했을 것인가.
-영화나 드라마는 팀 플레이죠.
“맞아요. ‘함께하는 과정’이 전부예요. 작게는 나와 나의 팀, 크게는 작품을 함께 하는 전체. 시작과 동시에 우리는 함께 가죠. 그러려면 각자 제 몫을 잘해야 해요. 주인공이라고 해서 더 큰 책임감을 느낀다? 그럴 짬이 없어요. 사실 내 거 하기 바빠요. 팀에 누가 되지 않으려면 그래야 하죠. 그 팀 안에서 누군가 자기 몫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균열이 가는 것이고, 그럼 그 ‘함께’가 안 되는 거예요. 주연이든, 조연이든, 단역이든 우리는 그냥 다 배우예요. ‘우리’가 ‘함께’ 가는 게 저에겐 정말 중요해요.”
-평생 거의 주연만 했어요. 그래서 보지 못하는 면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늘 이런 생각을 하려고 해요. ‘정말 내가 보는 게 다인가.’ 어쨌든 나는 ‘김혜수’이기 때문에 나한테는 다 잘해요. 나와 함께 출연한 조연이나 단역한테는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 있죠. 그래서 나는 나를 대하는 태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작업 과정에서도 나는 좋은 것만 보는 사람 중 하나예요. (주변의 어려움을) 보지 못하거나 망각하기 쉬운 사람인 거죠. 그렇다고 섣불리 조연이나 단역의 어려움을 운운하기엔 주제넘은 일일지도 몰라요. ‘이제 와서 고작 이거 조금 봤다고, 네가 뭘 안다고’ 싶을 수 있으니까.”
‘주연 콤플렉스’, 그런 단어가 있다면 그는 적어도 그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배우다.
-작품을 선택하고 나서 ‘아, 이건 잘못 택했다’ 싶은 경우도 있나요.
“아우, 많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작품의 성패는 내가 결정하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수익이나, 평론가의 비평, 대중의 시각 같은 기준에 따라 다 다를 수도 있고요. 그런데 난 남들이 성공이라고 하건, 실패라고 하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성공이라고 해서 너무 좋지도, 실패라고 해서 가슴이 무너지지도 않죠. 만약 작품을 할 때 내가 최선을 다하지 못했거나, 그랬음에도 뭔가 극복하지 못했다면 그에 대한 성찰이 남을 수는 있겠죠. 내겐 과정이 중요해요. 과정이 전부지, 결과는 내 것이 아니에요.”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뭔가요. 변해왔나요.
“매번 달라요. 물론 다 생각나지도 않지만. 옛날에는 유명한 감독 작품을 해야 할 것 같고, 유명한 배우와 해야 내가 더 발전할 것 같기도 했거든요. 배역에 변화를 줘야 연기의 폭이 느는 줄 알기도 했고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가장 중요한 건 ‘지금 내 마음’이에요. 그때 감정이나, 컨디션, 주변 사정 그 모든 걸 합해서. 그래서 난 늘 그 순간에 충실해요.”
-시간과 더불어 사람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죠. 인간관계나 인연의 실패도 있었을 거예요.
“그걸 배웠어요. 사랑하는 존재와 경계를 허무는 걸 조심하자. 나를 위해서도 그래요. 사랑하는 사람을 오래 보려면 경계를 분명히 지켜야 하더라고요. 세상에 거저 되는 건 없어요. 소중하면, 소중한 만큼 노력해야 해요.”
그는 자기 생각을 얘기하다가도 “이기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이 나이에 건방진 말이지만” “양심 없는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같은 말을 곧잘 붙였다. 그것이 성찰의 찰나로 느껴졌다.
하긴 그는 자문과 자각이 몸에 밴 사람. 공적이든, 사적이든 어떤 자리에 나가기 전 스스로 꼭 하는 물음이 있다고 했다.
※[실패연대기] 배우 김혜수③으로 이어집니다. 기사는 22일 오전 11시에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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