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해 복구 동의서' 촉박한 제출 기한 탓에
오해 쌓여 원수 사이 돼... 결국 소송전으로
"종이 한 장 때문에…."
서울 관악구 반지하 주택에서 7년 가까이 거주한 임모(54)씨는 같은 건물 3층에 사는 집주인 A씨와 원수지간이 됐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두 사람의 사이는 좋았다. A씨는 매달 공과금을 꼬박꼬박 내는 임씨를 "임 사장"으로 존대했고, 임씨도 A씨를 "할머니"라 부르며 친근감을 표했다. A씨는 빨래 건조대를 만들어주는 등 살갑게 대하는 임씨에게 "이사 가지 말라"면서 각별히 챙겼다.
지난해 8월 서울 일대에 쏟아진 물폭탄은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를 완전히 갈라놓았다. 당시 임씨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무릎 높이까지 차오른 물을 바가지로 퍼내느라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임씨는 14일 "종일 물만 퍼내느라 일도 나가지 못했다. 썩은 냄새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폭우가 지나간 뒤 사달이 났다. 침수 피해 얼마 후 임씨는 A씨가 건넨 종이 한 장을 받았다. "구청에서 주는 재난지원금 200만 원을 집주인과 세입자가 절반씩 나눈다"는 내용이 담긴 '주택 침수피해 확인 동의서'였다. 그런데 문서에는 이미 임씨의 서명이 기재돼 있었다. A씨가 임의로 적어 넣은 것이었다.
임씨는 즉각 A씨에게 따져 물었고, 고성이 오갔다. A씨 측은 "제출 기한이 촉박한 데다, 구청도 설명을 제대로 해주지 않아 나온 실수"라며 "속이려 했다면 동의서를 왜 보여줬겠느냐"고 해명했다. 임씨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6년 이웃사촌 정을 200만 원에 팔려고 했다"고 확신했다.
항의 끝에 재난지원금은 전액 임씨에게 주어졌지만, 한번 금이 간 신뢰는 회복하기 어려웠다. A씨 측은 사과의 의미로 "도배장판을 하게 되면 비용을 대주겠다"고 약속했다. 견적가 38만 원을 입금하겠다는 의향도 내비쳤다. 그러나 직접 작업을 한 임씨가 노동 대가를 더 달라고 요구하자 A씨 측은 "터무니없다"고 맞섰다.
양측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임씨도 돈을 받지 못했다. 이후 그는 항의 표시로 공과금과 월세를 내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말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상대를 향한 호칭도 어느덧 "할망구"와 "그 사람"으로 바뀌었다. 10개월 동안 월세를 지불하지 않아 보증금 300만 원은 모두 소진됐다. A씨는 결국 임씨를 상대로 명도소송을 제기했다. 임씨도 집주인을 상대로 맞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사례는 재난지원금을 둘러싸고 잦은 분쟁을 겪는 소유주와 세입자의 갈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물난리가 없었다면, 자치구가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두 사람은 지금도 돈독한 이웃으로 살고 있을지 모른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애초 개인 간 합의에 맡기지 말고, 지원금 목적을 명확히 한 뒤 수혜자를 특정해 주지 않은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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