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리베이트와 주요국 데이터 분석
작년 국내서 배출된 고인용 연구자 63명
과학자로서 영예... 질 높은 논문 유도도
기초과학 HCR 적어... R&D 체계 정비해야
연구비 세계 2위인데, 상위 1% 논문 17위
윤석열 정부가 내년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을 예고했지만, 그간 우리나라 R&D 투자 규모는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려왔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과 비교해 봐도 뚜렷하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 규모는 2012년 이후 올해까지 줄곧 이스라엘 뒤를 이어 2위에 자리했고, 상승폭도 가팔랐다.
그렇다면 국내 연구의 '질'은 세계적으로 얼마나 경쟁력이 있을까. 한국일보는 약 한 달간 학술정보분석기업 클래리베이트 코리아와 함께 이를 분석했다. 클래리베이트는 22개 연구 분야에서 피인용지수1가 상위 1%에 해당하는 논문 중 부정행위 등 연구윤리에 문제가 있는 저자를 제외한 뒤 선정하는 'HCR(Highly Cited Researcher·고인용 연구자)2'을 매년 발표하고 있다. 이번 분석에는 클래리베이트가 2014~22년 공식 발표한 국가별 HCR 데이터를 활용했다.
연구 분야별 편차 큰 한국...응용 분야 쏠림 탓
한국은 22개 연구 분야에서 골고루 HCR을 배출하는 나라들과 달리 '쏠림 현상'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2018년부터 분야별로 분석해 보면 여러 학문을 융합한 크로스필드(cross field) 분야의 HCR 배출이 106건으로 가장 많고, 재료공학(34건)·화학(33건)·임상의학(19건)·공학(17건) 순이다. 반면 약리학 및 독성학과 물리학은 각각 2019년과 2018년 이후 HCR 배출이 아예 중단된 상태다.
일부 연구자들이 크로스필드로 분야를 옮겼을 가능성이 있지만, 다른 국가와 비교해 기초과학 분야에서 HCR 배출이 적은 편이다. 2016년부터 매년 HCR에 선정된 선양국 한양대 에너지공학과 교수는 "아무래도 우리나라가 제조업을 기반으로 성장해 왔다 보니, 연구비나 연구인력이 화학공학이나 재료, 소재 분야에 집중된 것이 사실"이라면서 "응용 분야 연구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기초 분야 연구가 더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비를 무턱대고 삭감할 게 아니라 취약한 분야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국가 R&D 지원 체계를 재정비해야 한다는 과학계 지적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싱가포르·홍콩 비결은 개방적 연구 환경
지난해 기준 한국에서 배출된 HCR은 총 70건으로, HCR을 배출한 69개국 중 순위는 17위다. 미국이 2,764건으로 1위, 중국이 1,169건으로 2위를 기록했다. HCR은 저자의 국적이 아닌 연구기관의 국적별로 분류되며, 동일한 저자가 여러 분야에서 선정된 경우에도 중복으로 집계한다. 논문 건수가 아닌 연구자 수로 따지면 지난해 국내에서 63명의 연구자가 HCR에 선정됐다.
눈에 띄는 건 같은 아시아 국가 중 한국보다 GDP 순위가 낮으면서 R&D 투자 규모도 적은 싱가포르(11위·106건), 홍콩(14위·97건)보다 HCR 배출이 적다는 점이다. 특히 싱가포르나 홍콩은 전체 논문 수 대비 피인용 횟수 상위 1% 논문의 비율이 2%대로, 한국이나 주요국 평균의 2배에 달한다. 전체 논문 수가 많지 않아도, 다른 연구자에 의해 활발하게 인용되는 논문의 비율은 월등히 높은 셈이다. 많이 인용될수록 우수한 논문으로 평가받는다.
국내 연구자들은 싱가포르나 홍콩이 해외 연구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문호를 개방한 점이 연구 성과를 끌어올린 것으로 보고 있다. 이영희 성균관대 HCR 석좌교수는 "싱가포르 정부와 연구기관은 해외 유수 연구자들을 공격적으로 채용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서 “2010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교수는 싱가포르 국립대 소속으로 연구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2019년 부임해 두 차례 HCR에 선정된 이진욱 성균관대 나노공학과 교수는 "국제학회에서 만난 싱가포르나 홍콩 교수들을 보면 매우 빠른 속도로 우수한 연구 환경을 갖춘 뒤 성과를 낸다"면서 "역량을 가진 과학자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지속적으로 투자해온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HCR 많으면 노벨상 가능성 올라갈까
HCR이 한 나라의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절대적 지표는 아니다. 하지만 피인용지수가 상위 1%에 해당하는 논문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만큼, 연구자들은 HCR 선정을 영예롭게 여긴다. 성균관대는 아예 연구 몰입도를 높이고 연구자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HCR 석좌교수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나아가 노벨상 수상자 중에서는 HCR에 수차례 선정된 이력이 있는 연구자들이 많아, HCR을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가늠하는 지표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에는 학계 영향력 등 다양한 요소가 개입돼, 반드시 HCR에 양적으로 많이 선정된다고 해서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는 "노벨상은 통상적으로 특정 연구 분야에서 최초로 이론을 개발한 사람, 해당 분야를 중흥시킨 사람, 산업적 잠재력을 키운 사람 등이 선정된다"면서 "피인용지수 등 계량화된 지표는 노벨상 선정 기준과 거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질적으로 수준 높은 논문을 꾸준히 쓰는 것을 유도하는 측면에서 HCR은 충분히 의미를 갖는다. 선양국 교수는 "100편의 논문을 내는 것보다 질 높은 10편의 논문을 내면 HCR에 선정될 가능성이 올라간다"면서 "학계 분위기도 질적 연구가 활발해지는 방향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진욱 교수 역시 "과거에는 논문이 출판된 저널의 영향력으로 연구의 질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논문의 피인용지수를 직접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특정 과학기술이 진보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 연구는 자연스럽게 후속 연구에 많이 인용되고, HCR에 선정된 연구자들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 1 피인용지수
- 어떤 논문이 다른 논문에 인용된 정도를 수치로 나타낸 값. 인용된 논문이나 그 논문이 실린 학술지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쓰인다.
- 2 HCR(Highly Cited Researcher·고인용 연구자)
- 연구 분야별 최우수 논문(피인용지수가 상위 1%인 논문)을 가장 많이 보유한 연구자. 노벨상 수상자들 중엔 HCR에 여러 번 선정된 연구자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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