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35> 서울 청계천
서울 도심을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는 청계천(淸溪川). 이 청계천을 모르면 한양을, 또 서울을 안다고 말하기 어렵다. 조선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뒤, 청계천을 정비하는 일은 궁궐 축조에 견줄 만큼 핵심적인 도시 계획이었을 것이다. 태종 때 정비했고 그 후 주기적으로 준천(濬川ㆍ물이 잘 흐르도록 개천 바닥을 파내는 작업)을 해 개천(開川), 즉 ‘새로운 하천을 열다’라는 이름을 얻었다. 특히 영조 재위 시절이었던 ‘경진(庚辰ㆍ1760년) 준천’ 후에는 왕이 직접 행차해 동전을 뿌리며 축하했을 정도로 중요한 국가사업이었다.
한양 천도 이후 600년 가까이 흐른 지난 1977년 하천이 복개(覆蓋ㆍ덮어씌움)돼 도로가 생겼고 청계천은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서울살이 애환의 편린들을 남몰래 간직한 어두운 공간으로 변했다. 반면, 청계천 복개면 위에 생긴 청계로 주변 상가들은 조선시대에는 상상도 못했을 국가 중추 산업 현장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2003년 시작된 청계천 복원 사업. 하천 위 길이었던 청계로가 사라지고 청계천이 우리에게 돌아왔다. 전대미문의 토목사업이었다. 이 거대한 사업에 앞서 문화재 발굴은 필수 작업이다. 지금은 말끔하게 정리돼 맑은 물이 흐르는 도시 하천이 됐지만, 복개 직후의 청계천 문화재 발굴 현장은 그야말로 숨 쉬기조차 어려운 하수도 속이었다.
도심 구간의 하천 전체를 발굴하는 일은 세계적이자 세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서울은 이 발굴을 통해 ‘어느 곳이나 유적으로 가득 찬 도시’라는 사실을 확실히 입증했다. 이제는 그 위에 더 이상 아무것도 덮이지 않을 청계천이다.
‘쓰레기 고고학’의 대사건
흔히 ‘고고학 유적’이란 절, 신전, 무덤, 궁전 등 오래 보존되길 바라는 옛사람의 염원이 깃든 화려한 건물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웬 쓰레기 고고학? 고고학에서 자주 다루는 ‘쓰레기 더미’가 있는데, 바로 패총(貝塚ㆍ조개더미)이라고 불리는 유적이다. 이것은 고대인들이 먹고 버린 음식물 쓰레기가 쌓여 남은 것이다. 현대 쓰레기 고고학은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시작됐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고고학자들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는지 검증하기 위한 시도였다고도 할 수 있다.
유적이 발굴되면 고고학자들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ㆍ문화 등에 대해 많은 추측들을 내놓지만, 실제 생활상이 고고학자들의 추측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현대 고고학자들은 유적지의 쓰레기 더미에서 나온 각종 생활용품을 통해 당시 생활상을 복원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바로 ‘쓰레기 고고학’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960년대에 고 김원용(1922~1993) 교수가 소사 신앙촌 쓰레기 더미를 발굴해 세계적인 인류학 잡지에 보고한 적이 있다.
청계천 하수도 유적 발굴은 아마도 현대 고고학사를 장식할 대발굴 작업이 아닐까 한다. 청계천은 ‘현대 메트로폴리스’인 서울의 생활사가 가장 잘 보존된 유적이기 때문이다.
청계천, 숨겨진 서울의 역사
청계천(淸溪川). 혹자는 일제 강점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고, 인왕산의 청풍계천(淸風溪川)에서 유래됐다는 속설도 있지만, 그 어원은 아직도 분명치 않다. 한양에 도읍하기 전에는 ‘실개천’이었다고도 하는데, 한양 내사산(內四山ㆍ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에서 흘러드는 물에, 청계천 주류라고 보는 백운동천(白雲洞川)과 여러 지천까지 모였으니 ‘실’ 자가 들어갈 정도의 작은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청계천 지류가 있는 곳에는 각기 고유한 도시 기능을 갖추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청계천은 당시 한양의 척추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970년대 이후 강남이 개발되면서 한강이 서울의 중심부 역할을 하게 됐듯 당시엔 청계천이 그 역할을 한 셈이다. 오늘날 서울 한강 변에 가장 좋은 아파트들이 줄지어 있지만, 한양 청계천 변도 가장 핫(hot)하고도 쿨(cool)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힘든 발굴 작업이기는 하지만, 흥미로운 유물에 대한 기대도 컸다.
고고학자의 헛된 꿈
일반 대중에게 ‘발굴’이란, 아마도 무령왕릉이나 천마총 등 화려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왕릉 발굴’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청계천 발굴도 또 다른 의미에서 한국 고고학 발굴사를 새롭게 썼다. 세종 대에 청계천 용도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하수도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최종 정책으로 선택됐으니, 청계천 발굴은 세계 최대 하수도 발굴이기도 하다.
나는 발굴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문화재위원으로 여러 차례 현장을 방문했다. 청계천도 강인 만큼, 조선시대 유구(遺構)뿐만 아니라, 내 전공 분야인 구석기 유적도 하나쯤 건질 것으로 은근히 기대했다. 하지만, 그건 헛된 꿈이었다.
복개된 내부 공간에는 청계로를 받치는 교각이 줄지어 있었고, 물 흐름 옆에는 수십 년간 홍수로 쌓인 모래톱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글자 그대로 도시 하수도의 모습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발굴 전 복개 공간에 대한 환상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잊힌 작은 추억을 기억나게 하는 것들
또 하나의 작은 기대는 지금은 사라진 근현대 유물들을 많이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어릴 적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진 기억, 미국 버클리대 유학 시절 로위(Lowie)인류학박물관에서 샌프란시스코 대지진(1906년)이 남긴 하수도 유물을 정리하던 기억이 오버랩됐다. 그리고 당시의 흥분이 청계천 발굴에서도 재연되길 기대했다. ‘아, 그렇지! 이건 예전 우리 집에도 있었어!’라는 감탄사를 자아내는 유물들이 눈앞에 나타나 주길 말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 준천 작업과 복개 공사 과정에서 퇴적층이 유실됐는지 유물이 다양하거나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누군가가 다리 위에서 떨어뜨린 비녀가 발굴단 손끝에서 반짝거리며 나타날 때는 ‘어느 할머니의 역사’가, 떠내려가다가 하수도 바닥에 묻힌 한 청년의 주민등록증에서는 술 취한 청년의 비틀거리는 모습이 그려졌다. 또 화투장들은 담요 위를 힘차게 내리치며 ‘고!’라고 고함치는 서민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했다. 쓰레기에서 건져 올린 추억의 편린들이었다.
청계천 다리의 재발견
하천 바닥에 쌓인 퇴적물에서 생활 유물을 건져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청계천 발굴 과정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업은 청계천 복개 콘크리트를 잘라내는 것이었다. 청계천 뚜껑을 여는 것은 오랫동안 숨겨진 서울의 보석, 바로 아름다운 옛 다리들을 발견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어두운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다리 구조물에서는 당시 조선인들의 토목 기술과 감성을 엿볼 수 있었다.
청계천에는 20세기 초에 제작된 것들을 포함해 모두 15개의 다리가 있었다. 많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잊힌 다리들을 되찾은 것이다. 다만,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꼽히는 수표교는 아직도 장충단공원에 옮겨져 있다. 그래서, 아직도 청계천 복원 사업은 진행 중인 셈이다.
광통교 발굴에서 느낀 인생유전
한양에서 가장 큰 다리가 바로 광통교였다. 숭례문(남대문)에서 보신각으로 가는 길에 놓인 청계천 다리다. 일제가 서울의 도시구조를 바꾸기 이전에 이 길은 왕성에서 육조 거리, 그리고 숭례문을 잇는 한양의 중심 도로였다.
그런데, 광통교 다리 밑을 받치고 있는 아름다운 석조각물은 신덕왕후(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아내 계비 강씨)의 능(정릉) 장식물이란다. 누가 감히 조선 최초 왕비의 무덤 부재를 하수도 다리의 하부 석축에 사용했을까? 그것도 처박아 버리듯이 거꾸로 뒤집어서 말이다. 바로 태종이었다. 신덕왕후는 살아생전 태상왕 태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지만, 사후엔 신의왕후(이성계의 첫 번째 아내 한씨. 정종ㆍ태종의 어머니)의 아들인 태종에 의해 멸시받은 것이다.
이런 사연을 품은 광통교를 보고 있자니, 문득 계모인 신덕왕후의 위상을 격하시킨 태종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든다. 아, 그 호방한 왕도 그저 인간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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