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복부인, 아파트, 강남...자본주의의 '명령' 벗어나기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스포일러를 다량 포함하고 있습니다.
철근 빠진 ‘순살 아파트’ 사태가 연일 언론 지면을 장식하고 있던 8월 어느 날,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봤다. ‘순살 아파트’ 사태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딱 그만큼, 영화와 영화 속 인물들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영화는 모든 것이 무너진 재난의 한가운데, 무너지지 않은 ‘황궁아파트’와 살아남은 주민들을 그린다. 알 수 없는 재난, 하나 남은 아파트 그리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오늘의 한국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지방도시에서 자란 내게 20층 이상의 대단지 아파트는 ‘서울의 풍경’이었다. 몇 개 동으로 구성된 아파트가 살던 동네에도 지어졌고, 그 아파트에 살던 아이들의 입성이 두드러지게 깔끔하긴 했다. 그러나 지방도시의 변두리 동네에까지 아파트와 계급, 그에 따른 구별짓기가 당도하지는 않았던 때였다. 아파트에 살던 아이들과 주택에 살던 아이들은 같은 초, 중, 고등학교를 다녔고 함께 공부하고 놀았다. 중학교를 다닐 때 그 아파트에 살던 학생이 성적을 비관해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기는 했다.
다 같은 강남 아파트가 아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에 온 나는 과외 선생으로 일하면서 대단지 아파트라는 곳을 처음 가봤다. 잠실의 아파트 단지에서는 길을 잃기 일쑤였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잘리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 때문에 땀에 흠뻑 젖어 도착하면 어머니들은 피곤한 얼굴로 우유며 과일, 과자를 내주었다. 어머니들은 간호사, 학원 원장, 교사 등 ‘워킹맘’들이었다. 나를 챙겨주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일도 잦았다. 강남의 ‘잘사는’ 동네 여성들이 전업주부가 아니라는 게 의외였다. 아버지들은 본 적이 없다.
나중에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공화국'을 읽고 이 상황을 이해하게 됐다.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서울의 아파트 단지에 대한 인류학적 조사를 바탕으로 쓴 이 책에서 그녀는 한국에서 아파트가 중산층의 상징이 된 과정을 추적한다. 지금이야 아파트가 중산층이 되는 데 필수 조건이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한국인은 없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심지어 아파트는 하위계층이나 사는 곳이라는 이미지마저 있었던 시절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기업과 명문학교를 강남으로 이전시키고, 부유층과 고위 공무원, 유학 간 명문대 졸업자들에게 아파트 분양 우선순위를 주는 정책을 폈다. 압구정, 반포, 방배동의 대기업 아파트 단지들이 이들이 정착해 상층 중산층을 형성한 곳이다. 이들이 아파트를 거주 공간으로 수용하면서 중상층으로의 도약을 노린 하층 중간계급과 하층민들까지 아파트를 욕망하게 된 것이다. 내가 과외를 다녔던 곳들은 바로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중산층으로 가는 사다리에 발을 내디딘 이들이 주로 거주했던 곳들이었다.
자녀의 명문대 진학을 위해 월급을 아껴 과외비로 지출하고, ‘진짜’ 강남의 더 넓은 평수 아파트로 옮겨 가고자 동분서주했던 그녀들. 그러니까 강남도 다 같은 강남이 아니고 아파트도 다 같은 아파트가 아니었다.
가장이라는 이름도 없는 어머니의 노동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여기서 시작한다. ‘드림팰리스’라는 이름의 고급 브랜드 아파트가 무너지고 서민들의 ‘황궁아파트’는 건재한 그곳에서 황궁아파트 주민들은 피난 온 드림팰리스 주민들을 내쫓기로 결정한다. 자원의 부족보다는 평소 그들이 자신들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자원, 문화, 상징을 둘러싼 중산층 내 뺏고 뺏기는 싸움과 그로 인해 증폭되는 원한의 감정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동력이다. 중상층은 중하층을 무시하고, 중하층은 중하층으로 도약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하층민의 욕망을 이용해 사기를 치는 사회.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지옥도는 아파트가 상징하는 한국에서의 계급 상승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내보인다.
그런데 아파트는 중산층의 상징인 것만큼이나 행복한 이성애 부부와 가족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문장을 다시 써 보자. 아파트는 중산층 내 계급투쟁이 벌어지는 장만큼이나 부부의 삶이 격렬하게 전개되는 장이다. 아쉽게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 점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일단 이 영화의 서사를 이끄는 가장 중요한 관계와 갈등은 남성들 간에 벌어진다. 가짜 김영탁(이병헌 분), 가짜 김영탁에게 죽임을 당하는 진짜 김영탁(박종환 분), 착실한 젊은 남편 김민성(박서준)이 그들이다. 가짜 김영탁은 진짜 김영탁을 죽인 후 황궁아파트 입주민 행세를 하다가 주민 대표까지 하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권위주의적인 군대식 통제를 통해 황궁아파트 주민의 생존을 도모한다. 가족의 안전이 최우선 관심사인 김민성은 어느새 가짜 김영탁에게 동화되지만 결국 대립하게 된다. 표면적으로 가장 큰 대립인 가짜 김영탁과 김민성의 아내 주명화(박보영 분)의 갈등은 남성들 간 갈등의 밀도 높은 현실성에 비해 긴장감이 떨어진다. 현실적인 부딪힘에서 나온 갈등이라기보다 ‘우리끼리만 살아남자’와 ‘함께 살아보자’라는 두 이념의 대립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의 주제의식인 한국 중산층 내 계급투쟁은 남성들 간의 관계와 갈등으로 그려지는 셈이다. 그나마 부녀회 회장 김금애(김선영 분)가 배우의 뛰어난 연기에 힘입어 여성들이 어떻게 이기심에 기반한 아파트 공동체 형성에서 결정적인 친목 맺기와 자원 배분을 해 왔는지를 드러낼 뿐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아파트-영화라면 '모래'(강유가람 감독, 2011년)와 '버블 패밀리'(마민지 감독, 2017년)는 아파트-다큐멘터리다. 이 다큐멘터리들은 아파트를 기반으로 한 중산층 가족으로의 입성에 한몫을 한 여성들에게 시선을 할애한다. 감독들은 각각 은마아파트와 송파 올림픽아파트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이른바 ‘아파트 키드’들이다. 그들은 한때 살았던 강남 아파트가 어떻게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의 정보, 실행력, 노동에 기대어 마련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IMF 금융 위기를 맞아 집안이 쫄딱 ‘망한’ 이후에도 부동산에 기대어 끊임없이 환상을 좇는 아버지들을 뒷바라지하고, 돈을 벌고, 빚을 갚고, 살림을 하는 어머니들의 끝없는 노동을 보여준다. 아버지들은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환상을 좇지만 어머니들은 ‘집사람’이라는 역할로 가족을 건사한다.
다른 길들을 내자
오랫동안 한국에서 결혼은 호주가 되는 남성이 집을, 그 남성의 보호 아래 놓이는 여성이 세간살이를 장만해 합쳐서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풍습은 계층에 따라 매우 달랐다. 특히 남성이 집을 장만하기 어려운 경우 여성들의 노동과 정보력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70, 80년대 사회는 이런 여성들을 ‘복부인’으로 부르며 투기꾼이라고 비난했다. 정작 아파트를 투기의 대상으로 만든 것은 정부 정책과 이에 편승한 사회 분위기였는데도 말이다.
‘아파트 투기’가 ‘아파트 투자’가 된 건 1997년 IMF 금융 위기 이후 그나마 있었던 토지공개념 제도가 사라지고 부동산을 통한 경기부양이 제도화되면서부터였다. 래미안이니 자이니 하는 브랜드 아파트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다. 부부가 합심하여 아파트를 장만하고, 더 좋은 입지의 더 비싼 아파트로 갈아타는 것은 이제 올바른 시민의 의무가 되었다. ‘복부인’이라는 멸칭은 사라졌지만 이제 여성은 더욱 적극적이고 현명한 아파트 투자자가 되어야 한다. 이건 성평등해진 결과가 아니라 모두가 투기(투자?)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자본주의 명령의 결과다.
'모래'와 '버블 패밀리'의 말미에 감독들은 가족 소유의 부동산 가격이 오르기를 바라는 자신들의 욕망을 고백하고 성찰한다. 그리고 감독들의 이런 성찰은 부모들에게 가닿는다. 부모들은 많은 것을 희생하면서 부여잡고 있었던 강남을 떠나 진정 자신들이 편안할 수 있는 곳에 새롭게 정착한다.
이는 개인적 해법만은 아니다. 얼마 전 '버블 패밀리' 감독이 낸 책 '나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 가족'에서는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한 후 평온한 가족의 모습이 담겨 있다. 개인적 해법으로 보이는 많은 것들이 실은 사회적 모색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이지 않을까. 성별분업에 기반한 가족 구성, 아파트 입성, 중산층 도약이라는 경로가 모두의 정답일 수는 없다. 지금이야말로 각자의 경로를 탐색하는 용기와 그 경로를 좀 더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사회적 모색의 연대로 유토피아로 가는 다양한 길들을 낼 때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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