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 후 충북 영동에 임시 보금자리 마련
"학폭 피해자 위한 유일 시설" 한목소리
존속은 불확실...정부 구체적 대책 내놔야
"어머, 몰라보겠다 얘. 한번 안아보자!"
"저도 너무 뵙고 싶었어요. 오랜만에 자고 갈래요!"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던 19일 오후 충북 영동군의 한 산골마을. 경부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굽이길로 30분은 족히 달려야 도착하는 인적 드문 시골이 이른 아침부터 낯선 이들의 방문으로 왁자했다. 익숙한 얼굴을 찾는 눈동자들 사이로 연신 "반갑다"는 악수가 오갔고, 구경 나온 주민들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국내 유일의 학교폭력(학폭) 피해자 전담 기숙학교 '해맑음센터'가 건물 노후로 문을 닫은 지 4개월. 학생·학부모의 간절한 염원이 모여 센터는 정든 대전 유성구를 떠나 이곳 영동에 임시 둥지를 틀었다. 개교 10주년을 겸해 열린 이날 개소식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내·외빈 50여 명이 참석해 해맑음센터의 새 출발을 축하했다.
"해맑음은 치유의 공간"... 다시 뭉친 수료생들
그중에서도 주인공은 단연 간만에 해맑음센터를 찾은 수료생들이었다. 어느덧 어엿한 성인이 된 7명의 수료생은 새 보금자리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추억을 되새기기에 바빴다. 중학교 2학년 때 반 친구들의 따돌림을 피해 센터 문을 두드렸던 임수현(20)씨는 "개소식에 오고 싶어 아르바이트까지 뺐다"면서 "선생님과 친구들도 6년 만에 만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달음에 센터를 찾은 이유는 분명했다. 수료생들은 "자존감에 불씨를 댕긴 성냥 같은 곳"이라고 했다. 5년 전 1년간 센터에서 생활한 김윤호(19)씨는 "전학도 많이 다녀봤지만, 해맑음 덕에 '상처받지 않는 힘'을 기르고 학교로 복귀했다"며 이곳을 치유의 공간으로 기억했다.
시설안전과 예산부족 문제로 센터가 없어질 수 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피해 학생과 가족들이 앞장서 반대 목소리를 낸 것도 이 때문이다. 올해 5월 교육부가 퇴거 명령과 함께 지역교육청의 '위(Wee)스쿨'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을 때도 입소생 다수는 거부했다. 2019년 수료생 김모(21)씨는 "해맑음은 오직 피해자만을 위한 시설이란 점에서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전히 갈 길 먼 학폭 피해자 지원
물론 수련원을 개조해 만든 임시 시설을 교육 공간으로 삼기엔 부족함이 많다. 단적으로 가장 가까운 기차역이 차로 40분 거리여서 전국 각지에서 오는 학생을 받기엔 접근성이 너무 떨어진다. 또 급식시설이 없어 등산객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주변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하고, 교과 강사도 화상수업을 조건으로 겨우 구했다. 왕복 5시간 통근을 하는 김서영 교사는 "열악한 입지 탓에 재입교를 고사한 학생도 있고, 기숙사 역시 부족해 정원을 30명에서 20명으로 줄였다"고 설명했다.
해맑음이 계속 존속되리란 보장도 아직은 없다. 교육부는 이곳이 문을 닫은 지 한 달 반 만에 "국가 차원의 학폭 피해 전문기관을 2026년까지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가 위탁 운영하는 해맑음을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시설로 대체하겠단 뜻이다. 하지만 얼개만 덜렁 내놓다 보니 그사이 수업을 계속 임시 건물에서 해야 하는지, 10년 노하우를 가진 센터 교사들이 정부기관에서도 계속 근무할 수 있는지 등 모든 게 불명확하다.
2013년 개소 때부터 7년간 센터에서 일한 전직 교사 조윤채씨는 "해맑음은 외부의 전폭적 도움 없이 오로지 학생과 교사들이 똘똘 뭉쳐 지켜낸 곳"이라며 "지금 겪는 부침을 보면 10년이 흘러도 학폭 피해자에 대한 인식과 대우는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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