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인기 치솟은 달 항아리의 역사
편집자주
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추석 하면 으레 보름달을 떠올린다. 보름달이 뜨면 마녀와 늑대인간을 떠올렸을 서양인과는 달리, 우리는 달 토끼를 상상하며 달을 닮은 둥근 음식을 만들고 나눴다. 덜 굶었고, 더 베풀었을 수확의 계절, 가을의 밤에 보름달을 올려다보는 여유를 누렸을 것이다. 여유를 가지고 무엇을 즐거이 본다는 것, 그것이 감상(鑑賞)이다. 설날에는 해를, 추석에는 달을 바라보는 일은 자연스러운 예술적 감상일 것이다.
예술감상이 되는 달이 또 하나 있다. 조선 17~18세기 잠깐 등장했던 백자대호(白磁大壺), 달 항아리다. 달을 닮은 이 백자가 처음부터 감상의 대상으로 주목받은 것은 아니다. 달이 된 항아리는 2000년 이후부터 두둥실 떠오르더니 이제는 현대미술시장의 ‘핫 템’(인기상품), ‘K미술의 상징’이라 불릴 정도다. 얼마 전 서울에서 열린 세계적 아트페어(미술시장)인 ‘프리즈 서울 2023’과 국내 최대 아트페어인 ‘키아프 서울 2023’ 현장에서도 달 항아리 이미지가 만개했다. 지난 3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달 항아리는 약 60억 원, 지난 9월 19일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 나온 달 항아리는 약 47억 원에 낙찰됐다. 1,000년 전 어느 여인이 불렀다는 "달아 높이곰 돋으샤/어기야 머리곰 비취오시라"(정읍사)라는 말처럼 달을 닮은 항아리가 높이 떴다.
도자기, 세계 무역을 주도한 원천기술
인간의 역사는 그릇과 함께 기록됐다. 신석기시대 토기는 인류 생존과 번식을 위한 혁명적 도구였다. 음식을 안전하게 보관, 저장하는 일은 생명지속의 요건이다. 수천 년 전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가 흙, 물, 불, 바람의 조화로 만물을 이해했던 이유이겠다. 도자기는 1,300도 이하에서 굽는 도기, 그 이상의 고온에서 굽는 자기로 구분된다. 도자기 유물은 역사 연구에서 중요한 지표가 된다. 목재, 철기 등 부식되기 쉬운 유물에 비해 보존상태가 좋은 데다 새겨진 명문은 객관적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최근까지 상당한 도자기 연구가 이뤄졌다.
그중에서 중국, 한국, 일본의 도자기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아시아의 도자기는 단순한 그릇이 아니었다. 유출되면 안 되는 핵심 원천기술이자 국가를 먹여 살리는 수출품이었다. 중국은 일찍부터 원천기술을 보유했다. 8~9세기 무렵 자기 생산에 성공한 후, 실크로드를 통해 서방과 교역하며 아시아의 신비를 알렸다. 이런 기술이 한반도로 전해진 것은 10세기 무렵. 우리 선조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자기 생산에 성공했다. 이후 자체기술로 제작한 고려청자가 다양한 경로로 세계 각국에 알려지면서 우리나라는 ‘코리아’란 이름도 얻었다.
한창 고려청자가 명성을 날리던 13세기 무렵, 중국 원나라는 백자를 처음 만들었고 이슬람 상인들에게 얻은 회회청(코발트 안료)을 덧입힌 청화백자가 등장했다. 이슬람지역에 맞춘 수출 상품이었다. 칭기즈칸의 서방진출과 서유럽의 대항해시대가 맞물리면서 활발한 교역이 시작됐고, 청화백자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일본이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많은 조선 도공들을 데려가 뒤늦게 청화백자 기술을 확보한 일본은 중국이 잠시 쇄국정책을 펴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일본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아리타 청화백자와 채색자기를 유럽에 수출했고, 포장재였던 우키요에 판화 그림이 크게 유행하면서 유럽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때 거둬들인 돈과 학문교류가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중국도 해상금지령을 해제하고 다시 청화백자를 수출했고, 네덜란드 델프트 지역에서 코발트 안료를 사용하는 크락(Kraak)자기를 생산하면서 유럽의 부잣집마다 청화백자가 채워졌다. 그렇게 청화백자는 상류층의 취향으로 자리 잡았다. 안타깝게도 고려청자는 14세기 말부터 쇠퇴해 수출 명품의 명맥이 끊어졌고, 조선은 분청사기와 백자를 독창적으로 개발했음에도 당시 해외시장에 끼지 못했다.
무늬 없는 백자대호는 왜 사라졌을까?
고려 말부터 15세기 중반까지 한반도 도공들은 투박한 초기형태의 백자와 독창적인 분청사기를 만들었다. 조선 초기 왕실에서도 청화백자의 세계적 인기를 알고 있었지만 도공들에게 청화백자 생산을 요구하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비싼 코발트 안료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청나라는 청화백자의 민간차원 판매를 금지했고, 빼돌리다 들키면 사형에 처했다. 더군다나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세웠기에 비싸고 화려한 채색자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조선왕실은 백자를 공식 그릇으로 채택했다고 볼 수 있다. 1460년대 후반, 사옹원(왕의 식사나 궁중 음식공급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중앙관청)의 ‘분원(分院)’을 설치해 궁에서 쓸 백자를 독점 생산하도록 했다. 지방의 가마터는 왕실 납품의무에서 해방되는 대신 요역, 즉 노동력을 바치도록 했고, 분원 요역이 끝난 도공들이 고향 가마터로 가서 기술전수가 이뤄지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15세기에 유행했던 분청사기 가마터들이 16세기부터 대부분 백자 가마터로 바뀌었다. 임진왜란 후 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갔고, 병자호란 후에는 기근과 재해로 조선은 휘청거렸다. 조선이 가장 가난했던 17세기에 백자는 회색빛이 많았다. 백자대호는 이 시기부터 만들어졌다. 조선이 다시 안정을 찾아갈 무렵인 1754년, 사옹원은 경기도 광주에 분원을 정착시켰다. 이전에는 땔감을 찾아 자주 옮겨 다니는 불편이 있었고 기술장인의 공백도 심각했다. 분원이 한곳에 정착한 후 생산성이 높아졌다.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백자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있다. 분원이 정착한 이후부터 무늬 없는 백자대호가 잘 보이지 않았다. 18세기부터 왕실 납품 후 남은 제품의 민간 유통이 허용됐다. 상인 물주들이 투자와 유통에 관여하면서 왕실 주도 운영이 점차 민간 주도로 바뀌었다.
19세기에 이르면 분원마저 상인들이 좌지우지했다. 시장의 수요공급 공식을 따르면서 사용목적이 애매했던 백자대호의 수요가 줄었던 것은 아닐까. 아쉽게도 백자대호는 자세한 사료가 부족하다. 기름이나 장류를 담기 위해 만들었거나 양반들의 감상용이겠거니 추측할 뿐이다. 18세기 옹기(독)가 대중화되면서 서민들은 비싼 백자 항아리를 찾지 않았을 것이고, 골동품 수집이 유행하면서 양반들은 중국 수입품을 원했을 것이다. 철화 안료로 회화성을 높인 백자가 많아졌다. 역설적으로 무늬 없는 백자대호는 희귀한 유물이 됐다. 그러나 단지 희소성이 크다는 이유로 비싼 달 항아리가 된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달 항아리의 미학은 누구의 것인가?
조선백자가 세계에 알려진 과정에 일본이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은 긴 세월 동안 도자기술이 없었고, 막부시절부터 시작된 다도문화로 인해 도자기에 대한 열망이 유난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조선 가마터를 들쑤시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다. 그중에 다소 남달랐던 일본인들이 있었다. 아사카와 형제와 야나기 무네요시, 이 세 사람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아사카와 형제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들이었다. 조선에서는 정동교회에 출석했다. 일본의 기독교인 비율이 1%라는 점을 감안할 때, 아사카와 형제는 당시의 일본인들과 매우 달랐다고 봐야 한다. 형 노리타카는 1913년 조선 소학교 미술교사로 근무를 시작했고, 동생 다쿠미는 1914년에 조선총독부 임업부 직원으로 조선에 왔다. 1916년 두 형제는 야나기 무네요시를 만나 조선 일대를 함께 여행했다. 이들 셋이 경복궁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본 민예운동’을 일으킨 미술사학자다. 한민족은 한(恨)의 비애미가 있다고 해 식민사관 아니냐는 논란도 있다. 그러나 아사카와 형제의 시선은 달랐다. 그들은 고고학적 필드워크, 문헌조사 등을 통대로 다양한 논문과 저서를 남겼다. 특히 다쿠미의 저서 ‘조선의 소반’과 ‘조선도자명고’는 한국공예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다. 야나기와는 달리 한민족의 정서를 해학과 여유로움으로 평가했던 다쿠미는 현재 망우리공원에 잠들어 있다. 조선공예품 마니아였던 이 세 사람이 공통적으로 좋아했던 것이 크고 둥근 백자대호였다. 아사카와 형제와 야나기의 조선백자 찬미에 다양한 의견이 제기될 수 있다. 에릭 홉스봄의 저서 ‘만들어진 전통’을 떠올리며 조선백자를 소장하고 있는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찬사가 아닐지 조심스러운 우려도 가능하다. 달 항아리 이야기에 한국 추상미술의 대가 김환기의 일화를 소환하는 일도 조심스럽다. 김환기가 최순우와 함께 ‘달 항아리’라는 이름을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아사카와 다쿠미가 조선 문인 ‘폐허’ 동인들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는 점, 해방전후 문학집 표지로 조선백자가 자주 등장한 것도 기억해야 할 듯하다.
달 항아리가 서양에 알려진 것은 ‘영국 도자기 공방의 아버지’로 불리는 버나드 리치 덕분이다. 그는 야나기와 매우 가까웠다. 리치가 1935년 서울을 방문해 구입했던 47㎝ 높이의 백자대호가 현재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에 있다. 최근 미국 CNN 방송은 경매 소식을 전하며 “달 항아리는 한국 정체성의 아이콘"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모든 백자대호가 보물 대접을 받는 건 아니다. 리치가 대영박물관에 기증한 것과 비슷한 40㎝ 이상의 높이여야 한다. 지난 3월 경매에서 45㎝ 백자가 약 60억 원에, 같은 날 경매된 30㎝ 높이의 달 모양 백자는 1억3,000만 원에 낙찰됐다. 10㎝ 높이 차이가 59억 원 차이가 된 셈이다. 리치가 가져온 백자대호가 서양 현대도예에 미친 역사적 영향에 대한 가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유물과는 달리 백자대호는 기름이 밴 자국이나 소성과정 중의 사소한 균열이 있을수록, 적절한 흠결이 있을수록 가격이 높아진다. 완벽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인간적이라는 미적 취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백자대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아티스트가 많다. 특히 ‘달 항아리’를 외치는 해외 도예가들이 많다. 그들은 ‘조선 도공들이 만든 조선 양반의 군자의 미학’보다는 혹시 ‘일본 민예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영국 도예 거장이 감동한 자연미’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문제”라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옛것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이 예술임을 믿는다면, 오히려 ‘조선 양반의 선비정신’이 세계를 감동시킨 지점이 무엇인지 무리하게 찾지 않아도 좋으니,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글은 그저 추석 보름달을 닮은 항아리가 300년 넘게 담아 온 지난날에 대한 우리끼리의 수다이자, 읽는 분 모두 풍성한 한가위 되시길 바라는 소박한 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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