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범죄피해자연대' 구성
출범 한 달여 만에 100여 명 모여
피해자가 증거 확보 등 문제 지적
서로 재판 지지하고, 법 개정 활동도
"누구나 범죄 피해자 될 수 있다"
"전화로 '살아줘서 고맙다'라고 해서 처음엔 왜 고맙지 싶었죠. 그런데 인천 스토킹 살인 사건 유족이라는 얘기에 모든 게 달라졌어요. 제가 맞는 모습이 찍힌 CCTV를 찾느라 고생하는 부모님을 보면서 제가 차라리 죽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요. 언니가 전화하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 세상에 없었을 거예요."
-바리캉 폭행 사건 피해자 A씨
잇단 강력범죄...피해자들의 첫 연대
전 남자친구로부터 5일간 감금돼 바리캉(이발기)으로 머리카락을 잘리는 등 가혹행위와 성폭행을 당한 A(20)씨는 지난 8월 18일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목숨을 부지했다. 7월 인천에서 전 남자친구로부터 스토킹을 당하다 살해된 30대 여성의 사촌 언니 B(45)씨가 건 전화였다. B씨도 2007년 귀갓길에 한 남성에게 폭행을 당한 후 7년간 트라우마에 시달린 또 다른 범죄 피해자였다.
B씨는 "A씨에게 꼭 해줘야 할 말이 있었다"라며 "살아줘서 고맙다고, 제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고, 만약 제 동생이 살아있었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고 용기 내 전화한 이유를 밝혔다. B씨의 전화에 A씨는 그제서야 자신에게 향했던 원망을 내려놨다. 딸을 지키지 못해 자책했던 A씨의 부모도 큰 위로를 받았다.
B씨는 지난해 5월 부산에서 귀갓길에 모르는 남성으로부터 돌려차기 폭행 피해를 입고, 성폭행을 당할 뻔한 이른바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 피해자 C(27)씨에게도 먼저 연락했다. B씨는 "끔찍한 사건을 당하고도 숨지 않고 피해 사실을 알리는 C씨를 보고 함께 힘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강력범죄가 잇따르면서 범죄 피해자도 늘고 있다. 하지만 허술한 경찰과 검찰 수사, 느슨한 법망은 피해자들을 보듬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언론도 자극적이고 엽기적인 범죄 행각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피해자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지난해 5월 부산에서 발생한 이른바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올해 7월 일어난 '인천 스토킹 살인', 같은 달 '바리캉 폭행' 사건 피해자가 지난 2일 한국일보에서 모였다.
이들은 최근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범죄피해자연대(가칭 '경험자들')를 결성했다. 범죄 피해자들이 모여 조직을 꾸린 것은 국내에서 이번이 처음이다. 출범 한 달여 만에 범죄 피해자와 가족,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 등 126명이 함께한다.
"직접 증거 확보해 목숨 늘렸다"
A씨와 B씨, C씨는 지난 8월 25일 서울 성북구의 한 카페에서 처음 마주했다. 언론에 보도된 사건명으로 자신을 소개하던 이들은 황당한 현실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들은 범죄 피해 이후 처음으로 편히 웃고 즐거웠다고 했다.
생면부지의 셋을 끈끈하게 묶어준 것은 범죄 피해 이후 이들이 겪어야만 했던 현실이었다. 이들은 범죄 피해 이후 공통적으로 ①피해자가 직접 범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아야 하고 ②범죄 피해 이후 대처 방법을 알려주는 곳이 없고 ③범죄 피해 이후 수사 상황이나 재판 기록을 피해자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을 문제로 꼽았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인 C씨는 사건이 발생한 오피스텔 공동현관 폐쇄회로(CC)TV 영상 원본을 직접 확보해 언론에 알렸고, 자신의 바지에 묻은 가해자의 유전자(DNA)를 검출해 범죄를 입증했다. 가해자는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지만, C씨의 노력으로 2심에서 강간살인미수 혐의로 변경돼 대법원에서 징역 20년형이 확정됐다.
동생을 스토킹 살인으로 잃은 B씨도 C씨의 도움을 받아 휴대폰 카카오톡 메시지 등 증거를 모으고, 탄원서 제출 등 재판을 준비하고 있다. B씨는 "사건은 다르지만, 범죄 피해를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물어볼 곳도, 사실상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다는 점이 모두 같았다"라며 "C씨의 도움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B씨는 "동생이 스토킹 신고를 해서 보복 살인을 당한 것으로 보지만, 검찰은 살인 혐의만 적용해 기소했다"며 "보복 살인은 어떻게 입증해야 하는지 몰라 유족들이 증거를 모으고 있다"고 했다. A씨도 사건 직후 가족들이 CCTV 등 피해를 입증할 증거를 직접 찾으러 다녔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피해 사실을 적극 알려 공론화했다. C씨는 "수사기관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면 직접 나설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며 "열심히 알린 덕에 내 목숨을 12년에서 20년으로 늘렸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방송을 통해 사건을 꾸준히 알려온 B씨는 "아무리 전화해도 회신이 없었던 수사기관이 언론 보도 후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며 "피해자가 2차 가해를 감수하고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도 웃어도 되는 사람이구나"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돼 준다. A씨의 어머니는 "무의식 중에라도 웃으면 딸에게 해가 될까 봐, 범죄 피해 후엔 단 한순간도 웃어본 적이 없다"며 "피해자들을 만나 '나도 웃어도 되는 사람이구나'란 생각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C씨는 "최근 다른 사람들로부터 '생각보다 밝네요'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며 "피해자가 어둡고, 우울해야 한다는 대중의 시선이 오히려 피해자를 움츠러들게 한다"고 했다.
그는 "재판에 갈 때나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 저에게 왜 원피스를 입고 왔냐, 왜 꾸몄냐라며 '피해자답지 않다'는 비난이 적지 않았다"며 "혼자 있을 때 위축됐지만, 연대를 통해 잘못한 건 가해자지, 피해자가 아니라는 용기가 생겼다"라고 밝혔다.
A씨와 C씨는 지난달 말 인천 스토킹 살인 사건 첫 공판 때 직접 법정을 찾았다. 이들은 재판 내내 B씨와 유족들의 손을 잡고 다독였다. B씨는 "피해자가 직접 목소리를 내는 일이 또 다른 피해자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고 있다"며 "살아서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서로 보여주면서 힘을 얻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C씨는 지난 8월 19일 발생한 서울 관악구 신림동 등산로 성폭행 살인 사건 유족으로부터 연락을 받기도 했다. 사건 범인 최윤종이 검찰 조사에서 "부산 돌려차기 사건을 모방했다"라고 밝혀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그에게 유족은 "범죄 피해자를 위한 목소리를 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지난해 범죄 피해자 148만 명…"정부가 보호해야"
연대는 이제 첫발을 내디뎠다. 갈 길이 멀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발생 범죄 피해자 수는 148만2,433명. 이 중 702명이 살해됐고, 6,414명이 성폭행을 당했고, 24만5,286명이 폭행 피해를 입었다. 강력범죄 피해자가 17%에 달한다. 숨은 피해자들이 많다는 얘기다. 이들은 "피해자들이 서로 연대해야 나아질 수 있다"라며 "대처 방법 등 정보 공유도 중요하지만 서로의 존재만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것, 나한테만 닥친 불행이 아니라는 것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범죄 피해자를 보호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피해자 수사과정 참여권 보장 △초동수사 증거수집 강화 △피해자 재판기록 열람·복사 허가와 재판 결과 통지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자동 연계 △보복 범죄 예방 양방향 전자발찌 시스템 구축 △공탁·반성문제도 폐지 등 관련 법 개정도 추진할 계획이다.
이들은 누구나 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무겁게 경고했다. "우리가 먼저 범죄를 겪은 경험자일 뿐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저희가 겪은 일을 겪지 않으려면, 정부가 경험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들이 숨지 않고 보호받을 수 있도록 적극 나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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