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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남의 조종을 받는다는 의미로 쓰는 괴뢰(傀儡). 우리말로는 꼭두각시다. 영어표현은 Puppet이지만, 'Manchurian candidate'라는 말도 있다. 직역하자면 '만주인 후보'인데, 꼭두각시 의미로 쓰인 게 그리 머지않다. 1959년 이 제목의 정치 스릴러 소설이 나왔고, 1962년 프랭크 시내트라 주연으로 영화화됐다. 한국전쟁 당시 포로가 된 미국의 정치명문가 아들이 중국과 소련 요원에게 세뇌당해 정가에서 암약하는 내용이다. 2004년 리메이크 영화는 걸프전으로 배경이 바뀌었다.
□ 굳이 ‘만주’가 들어간 데는 2차 세계대전 시기 프랑스 비시 정부와 함께 현대사의 대표적 괴뢰 정부인 ‘만주국’과 연관된 게 아닌가 싶다. 일본은 1932년 만주를 점령한 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괴뢰정부를 세웠다. 소설과 영화의 영향으로 manchurian candidate는 정치적 비하 용어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미중 데탕트 주역인 헨리 키신저, 푸틴과 가까웠던 도널드 트럼프도 이 말을 들었다. 적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 괴뢰라는 쌍욕을 주고받는 데는 남북이 따로 없었다. 북한은 미 제국주의자들이 꾸린 꼭두각시라는 의미로 썼고, 우리 역시 소련과 중국의 조종을 받는다고 해서 북한 괴뢰도당, 괴뢰군이라고 했다. 줄인 표현인 북괴라는 말이 실제 이름인 줄 알 정도였다. 냉전 시기의 일이다. 동서 화해무드 속에 남북한이 1991년 9월 유엔에 동시가입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그나마 일반에 알려졌다. 남북한의 특수관계를 명문화한 기본합의서는 남과 북으로 표현했다.
□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북측 인사가 '북한'이라는 우리 기자 표현에 정식 국명을 말하라며 반발한 것도 이해는 간다.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직접 들을 땐 거부감을 느낄 만하다. 그런데 지난 2일 조선중앙TV가 남북한 여자축구 결과를 보도하면서 일반적으로 써온 '남조선' 대신 '괴뢰'로 자막을 넣어 우리를 자극했다. 스포츠 보도에서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다. 통일부는 5일 "자신감의 결여"로 평가했다. 최근의 남북관계가 반영된 성마른 반응이긴 하나 북한도 국격과 품위를 생각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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