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30 에즈라 파운드
미당 서정주 등에 대한 친일문학 논란이 일 때면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0.30~1972.11.1)를 둘러싼 논쟁이 떠오르곤 한다. 파운드는 20세기 미국 문학의 상징적 존재이자 모더니즘 시학의 개척자 중 한 명이란 평가와 함께 2차대전기 가장 악질적인 나치즘-파시즘 부역자로 손가락질 받는다.
조국 미국의 “천박한 물질주의”를 경멸하고 반문화적인 러시아 공산주의 역시 히틀러 못지않게 혐오했다는 그는 1941년 4월부터 1945년 1월까지 이탈리아에 머물며 베니토 무솔리니와의 사적인 친분을 과시했고 ‘라디오 로마’ 등 이탈리아 방송을 통해 매주 네 차례 영미 연합국과 프랭클린 루스벨트-윈스턴 처칠을 비난했다. 다양한 매체 글로 유대인을 ‘오물(filth)’에 비유하며 우생학을 찬양하기도 했다. 그는 파시스트 정부 대중문화부에서 공식 임금으로만 총 1만2,500달러(당시 기준)를 받았고, 라팔로 해변 휴양지 저택에 사는 특권도 누렸다.
그는 전후 미국 정부에 의해 반역죄로 기소돼 1945년 12월 재판에서 정신이상 판정을 받아 정신병원에서 지내다 1958년 퇴원(석방)했다. 그가 병원에 있던 1949년, 미의회도서관 문학펠로들이 전년도 출판된 미국 최고의 시집에 수여하는 ‘볼링겐 상(Bollingen Prize)’ 수상작으로 그의 책 ‘칸토스’(1948)를 선정했다. 영미권 문단 안팎에서 반발이 빗발쳤다. 로버트 프로스트 등 그 결정을 옹호한 이들도 물론 있었다.
서울대 국문과 방민호 교수는 한 칼럼에서 정치·문학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을 인용했다. “파운드가 위대한 시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종차별주의자였고 파시스트였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가 인종차별주의자였고 파시스트였기 때문에 위대한 시인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출전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그가 저 말을 정말 했다면 아마 저 무렵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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