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발전시킨 1975년 총파업에 뿌리
총리 "남성 장관이 업무 대행... 연대 차원"
파업 주최 측 "성평등 기대에 부응할 책임"
카트린 야콥스도티르 아이슬란드 총리가 24일(현지시간) '업무 중단'을 선언했다. 직장과 가정에서 벌어지는 성차별을 해소하자는 취지로 기획된 '여성 총파업'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아이슬란드 여성들은 1975년 첫 총파업에 나선 뒤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 간간이 파업에 돌입했는데, 7회째를 맞은 올해의 경우 2018년 이후 5년 만이다. 전국 각지에서 하루 종일 파업이 진행됐다.
야콥스도티르 총리는 자신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파업에 동참한 게 아니다. 정부 수반인 '총리'로서 이번 총파업에 연대와 지지의 뜻을 표명하는 차원이다. 파업에 따른 총리의 업무 공백을 다른 남성 장관이 기꺼이 메우고 시민들도 이를 이해할 정도로, 아이슬란드에서는 지위·성별·나이를 불문하고 성차별 해결에 팔을 걷어붙인다. 세계 최고의 '성평등 모범 국가'로 꼽히지만, '완전한 성평등' 달성을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고 있다.
최대 규모 파업 '예상'... 내각, 회의 하루 미루고 '연대'
아이슬란드는 '다보스포럼'으로 알려진 세계경제포럼(WEF)이 매년 발표하는 성평등 지수에서 14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올해 역시 남성의 권익을 1로 뒀을 때 여성 권익 수준을 의미하는 WEF 성별격차지수에서 0.912를 기록, 조사 대상 146개국 중 유일하게 0.9를 넘었다. WEF 평가 기준인 경제·교육·의료·정치 분야에서 두루 좋은 성적을 받았다. 같은 조사에서 한국은 105위에 그쳤다. 프랑스 르몽드는 "의회 여성 비율이 47.6%로 유럽에서 가장 높고, 여성 고용률은 2021년 77.5%로 유로존(유로화 사용 국가) 평균인 67.5%를 상회하며, 육아휴직은 부모가 거의 균등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지난 3월 보도했다.
그럼에도 이 나라의 약 40개 인권단체는 24일 수도 레이캬비크를 비롯, 전역에서 여성 총파업을 기획했다. 긍정적 지표들에 가려진 차별이 여전히 많은 데다, 다른 국가와의 비교를 통한 상대 평가에 안주해선 진정한 성평등을 구현하기 힘들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 최대 공공근로자 노동조합인 공공근로자연맹(BSRB)의 프레야 스테잉림스도티르 커뮤니케이션 이사는 "남녀 중위소득 격차가 21%이고, 여성 40%가 평생 동안 성폭력을 경험한다"고 미국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야콥스도티르 총리뿐 아니라 여성 장관들도 동참했다. 매주 화요일 내각회의가 열리는데, 총파업 참여를 위해 24일 회의를 다음 날로 미뤘다고 현지 언론 아이슬란드모니터는 전했다. 아이슬란드 내각을 구성하는 12명 중 6명이 여성이다. 남성 장관들도 총파업을 지지했다. 야콥스도티르 총리는 "알싱기(의회) 업무는 남성 장관들이 대신할 것이며, 이는 우리의 연대를 보여 주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여성 총파업으로 어느 정도의 업무 공백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역시 그간 저평가됐던 여성의 역할과 기여도를 부각하는 방식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파업 주최 측은 특히 무급 가사 노동자에게 "파업 참가를 위해 일을 앞당겨 끝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라"고 권했다. 이날 파업 집회에는 레이캬비크에만 최소 2만5,000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됐다.
1975년 이후 사회 바뀌었듯... 2023년에도 '노력 중'
올해 파업은 1975년 같은 날 열린 여성 총파업을 본떴다. 당시 유엔이 1975년을 '여성의 해'로 지정한 것을 계기로 여성단체들은 아이슬란드 내 성차별·성폭력 폭로를 위해 총파업을 기획했다. 미국 스와드모어대 자료에 따르면, 당시 아이슬란드 여성 임금은 남성의 60%밖에 되지 않았다. 여성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사를 온전히 떠맡는 경우도 허다했다.
차별적 현실을 직시하고 거리로 뛰쳐나가 첫 총파업에 참여한 여성은 전체(약 10만8,000명) 중 90%에 달했다. 이로 인해 학교, 은행, 항공 등 거의 모든 서비스가 마비됐다. 하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아이슬란드 내 성평등은 눈에 띄게 향상됐다. 이듬해 남녀고용평등법이 의회를 통과했고, 유급 육아휴직 제도가 도입됐다.
파업 효과는 직장 내에 그치지 않았다. 사회 전반에서 여성 인권이 증진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1980년 아이슬란드 첫 여성 대통령이 된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는 "1975년 파업은 아이슬란드 여성 해방의 첫 단계였고, 나를 민주적 절차를 거쳐 당선된 세계 첫 여성 대통령으로 만든 힘이었다"고 2015년 영국 BBC방송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올해 여성 총파업 규모는 1975년 첫 파업 이후 48년 만에 최대 규모다. 참가자들은 유치원 교사, 간호사 등 여성 노동자 비중이 높은 직업군이 저임금을 받는 현실을 집중 비판했다. 가사 노동 중요성을 부각하고, 사회 전반의 성폭력 근절을 위한 강력한 방안도 촉구했다. 스테잉림스도티르 이사는 "아이슬란드는 성평등의 천국인 것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기대에 부응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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